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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89

289
“이틀 뒤, 이 시간이 다시 오시면 됩니다. 저도 미리 연락해야 하고 준비도 필요하니까요.”

가야가 날 배웅하며 말했다.

‘이틀.’

이틀이면 많을 걸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가야의 부드러운 얼굴을 등지며 병원을 떠났다.

라르스도 날 따라붙으며 옆에 섰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가야의 병원을 보다가 날 다시 응시했다.

“포스 사용자를 지인으로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포스는 코라의 상징이기도 하다. 삼국 중에서 포스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 커리큘럼을 가진 건 코라 신성국밖에 없었다.

“포스 사용자라고 무슨 괴물이거나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야. 어차피 희로애락으로 움직이는 감정의 동물이다.”

“저 정도 포스 사용자라면 코라에서 고위직이거나 중요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릴 함정에…….”

“이봐, 라르스. 난 조언을 위한 부관을 둔 적이 없어. 그저 손발이 될 부하가 필요한 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라르스가 궁금증이 많은 것도 당연했다.

라르스는 아직 어리고 이번 임무의 배경에 대해서도 거의 모른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과 상관에 대한 신뢰만으로 타국에서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라르스는 막 훈련을 마친 군인이다. 매사에 능숙하지 못했고 경험도 부족하다. 민간기업의 훈련은 인적 손실을 줄이고 효율성을 우선시하기에 그만큼 ‘실전 경험’이 적다.

나는 느슨하게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가야는 신성국에 환멸이나 회의를 느끼고 떠난 자겠지. 신성국을 위해서 우릴 함정에 빠뜨리진 않을 거야.”

내 말은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사실일 터다. 가야에게 코라란…… 나와 제국의 관계가 비슷할 것 같았다.

가야는 국가와 조직, 그리고 온갖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더시티에 왔을 것이고, 그는 여기서 자신만의 영성을 갈고닦았다.

“……그렇군요.”

라르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르스를 다그칠 필요는 없어. 적절하게 설명하면 알아먹는 녀석이다.’

나도 인정한다. 내 지나친 공격성은 상관으로서는 결함 요소 중 하나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레이 대장님과 합류하실 겁니까?”

“굳이 둘이서 뭉쳐다닐 이유는 없어. 일레이는 일레이대로 알아서 일처리를 할 거다. 일단 나는 쟈파를 찾을 생각이다.”

“쟈파라면, 지금 공격받고 있는 기업의 수장 말입니까?”

라르스가 자신의 얕은 배경지식을 꺼내며 의구심을 내뱉었다.

“쟈파 상사가 키누안의 행적에 대해 알고 있을 수 있어.”

……내 행동에는 일리가 있다. 쟈파 상사 소속의 에퀘시안 용병들이 키누안을 마지막까지 추적했다.

이틀이나 시간이 남았으니 그쪽 정보도 알아볼 만하지…….

아니, 뭐, 됐다. 변명은 집어치우자.

솔직히 쟈파 상사가 망하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다. 그러나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 라피스 라줄리 같은 인물들이 죽진 않았으면 한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여력이 닿는 한 지켜주고 싶었다.

이건 내가 착해서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서도 아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마음이지…….’

지인들이 위험에 빠졌다. 어쩌면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인물들이다. 그걸 구경만 할 정도로 내가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 * *

나와 라르스는 허름한 호텔에서 교대로 수면을 취했다.

나는 깨어있는 동안, 네트워크에 접속해 보더시티에서 벌어진 기업 전쟁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다.

보더시티 네트워크에는 분쟁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 명확하게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내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키누안을 유인한 날에 모든 게 시작됐다.’

그날 쟈파 상사는 몹시 취약한 상태였다. 수장인 쟈파는 여전히 중태였고, 에퀘시안 용병단의 정예는 보더시티를 이탈한 상태였다.

‘쟈파 상사의 경쟁기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쟈파 상사에는 적이 많았다. 그간 쟈파의 역량으로 짓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쟈파 상사가 취약한 상황을 절묘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쟈파 상사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키누안의 수작질일 가능성도 있지.

어쨌든 중요한 건 쟈파 상사가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흐음.”

보더시티는 자잘한 기업까지 합치면 백여 개가 넘는 회사가 있다. 이번 사태의 복잡한 관계도가 홀로그램에 떠올랐다.

나는 뉴스 기사를 살피며 각 기업의 정보도 같이 열람했다. 내 동공이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뇌는 정보를 빨아들였다.

후릅.

난 가야에게 얻어온 차를 마시면서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잠깐 농담을 하자면, 난 술담배를 하지 않는 건전한 청년이다. 흐음, 그다지 재미는 없군. 혼자서 생각만 한 게 다행이다.

‘첫 시작은 보더시티 요식업계의 오랜 갈등으로 인한 분쟁처럼 보인다.’

쟈파 상사는 보더시티 요식업계의 아귀였다. 탐욕스럽게 요식산업 전반을 삼키며 확장했다. 보더시티에선 어딜 가도 쟈파 상사의 프랜차이즈가 있었고, 앙귀스 레지나의 노래와 광고가 들렸다.

다른 요식업체는 그간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그들은 쟈파 상사가 약해진 틈을 타서 움직였다. 쟈파 상사의 프랜차이즈 가게를 일제히 공격하며 각 구역의 지부까지 파괴했다.

‘쟈파 상사 대 반쟈파 요식업체 연합.’

처음 구도는 이러했다.

쟈파 상사를 이대로 놔뒀다간 다른 요식업체가 고사할 게 뻔했다. 그들도 마지막 기회를 틈타 발악한 셈이었다.

‘이번 분쟁으로 구역을 나누려고 한 거로군. 쟈파 상사의 활동 영역을 정하고, 넘어오지 말라는 듯이 말이야.’

보더시티 동부에서 쟈파 상사에 대한 공격이 극심했다. 요식업체 연합은 보더시티를 반으로 나누고 쟈파 상사와 협상할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사흘째부터 방향성이 바뀌었다.’

요식업체 연합은 동부만이 아니라 서부, 그리고 쟈파 상사의 본사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에퀘시안 용병의 정예가 빠졌단들, 쟈파 상사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손수공업이 이때부터 나선 거다. 반쟈파 연합을 지원한 거야.’

손수공업은 요식업체가 아니다. 쟈파 상사가 몰락하더라도 얻는 사업적 이득이 없었다. 다른 목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이때 반쟈파 연합에서 빠지는 회사들이 있어.’

요식업체이긴 하나 이종족에 우호적이거나 그쪽 기반의 회사들이 빠지고 있었다.

‘어느새 쟈파 상사 대 반쟈파 연합의 구도는…… 이종족 대 인간의 구도로 변했다.’

이후로 분쟁의 규모가 커졌다. 요식업계의 갈등이 보더시티의 종족 갈등으로 번진 셈이다.

노바스 행성과 벨라토 연방의 주류 종족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많은 이종족은 주류 종족에 속하지 못했기에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때론 물리적인 핍박까지 당했다.

이종족 간에도 갈등은 있으나 인간과의 갈등만큼은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여러 종족들은 인간보다 여러 방면에서 우수한 종족이 많았다. 그들이 인간과 대등한 위치에서 사회로 진출하면 인간으로선 당해내기 힘들었다.

예컨대, 자연체 인간이 크롤러나 에퀘시안보다 ‘우수한 전사’가 되려면 말 그대로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육체노동으로만 따져도 크롤러 같은 종족은 인간보다 적은 돈을 받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이종족과 인간, 그들은 둘 다 서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제대로 일을 저질렀군, 손석재 사장.’

손석재가 종족 갈등의 도화선에 불을 질렀다. 예리한 통찰력이었다.

어느새 쟈파 상사와 요식업체 간의 갈등은 종족 갈등으로 번졌다.

이 사태에는 손석재를 비롯해 종족차별주의자들의 후원과 계략이 있었을 것이다.

‘아주 난장판이네.’

그렇다고 이종족 대 인간이란 구도가 명확한 것도 아니었다. 기업답게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회사도 있었다. 특히 용병들은 그저 돈에 따라 움직이며 차별주의자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혼란…….’

키누안이 무척 좋아하는 상황이었다.

‘엔과 에퀘시안들이 키누안을 손에 넣어서 감금하고 있다면 최고겠지.’

하지만 에퀘시안들이 키누안을 잡았을 것 같진 않았다.

키누안은 ‘자신이 내게 당할 것’을 예상했다. 그 이후의 대비도 해뒀을 것이다.

‘쟈파 상사는 아직 괴멸하지 않았어. 쟈파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다.’

쟈파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당연히 지금 내가 쟈파에게 연락할 방도는 없었다. 쟈파는 추적을 피해 모든 보안 회선을 바꾼 상태였다. 그는 혹시 모를 내 도움에 기대는 자가 아니다. 쟈파도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난관을 돌파하려 한다.

‘피곤하군.’

난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 앉았다.

휙!

교대 시간이 되자마자 라르스가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신병다운 기합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뉴스를 계속 살펴. 기업들의 움직임을 전부 기록하고.”

나는 라르스에게 말하며 자리에 누웠다.

전신의체인 라르스는 물론이고, 나도 당장 잠을 자지 않아도 되긴 한다. 그러나 나는 서너 시간 정도는 잘 생각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다. 다음에 일어나면 며칠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나는 내 뇌의 상태를 안다. 잠을 허투루 걸렀다간 고장 난 뇌가 비명을 지를 것이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만성이고, 감정이 쉽사리 출렁인다. 우울감은 검은 곰팡이처럼 폐부에 스며들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지 능력이 조금만 떨어져도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무너질 것 같았다.

털썩.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나는 수면통제 훈련도 받은 군인 출신이다. 수면 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다.

스륵.

난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냈다. 독한 수면제다. 왠지 이럴 것 같아서 준비해 뒀었다.

으적, 으적.

수면제를 씹어먹고서야 난 잠들 수 있었다.

* * *

난 키누안을 잡고, 지젤을 다시 만날 날을 꿈꾼다. 키누안을 잡고, 지젤을 만난다고 무엇이 바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무언가가 달라지긴 할 것이다.

‘변화에 대한 희망.’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가장 끔찍한 건 ‘변화하지 않는 절망’이다. 끔찍한 절망이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면 삶을 견딜 수가 없다.

“루…….”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내 몸을 다급하게 흔드는 라르스가 보였다.

움찔.

나는 내 전투 반사가 이성으로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작동하는 걸 느꼈다.

내 전투 반사가 여전히 예리했다면, 내 몸을 흔드는 라르스의 손을 잡아챘을 터다.

“무슨…… 젠장,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

나는 떨떠름하게 이마를 감싸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섯 시간입니다.”

라르스는 날 깨우려 했을 터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건 나다.

‘난 무방비하게 기절한 건가?’

라르스가 내 상태에 대해 보고했다.

“루카 님의 생명 반응이 가사 상태처럼 옅었습니다. 신호가 더 약해지면 일레이 대장님을 호출할 생각이었습니다.”

“약 때문이야.”

나는 일축했다. 그러나 약 때문은 아닐 터다. 난 언제 픽 쓰러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장기 요양을 해야 할 상황에서 격전과 임무를 연달아 맡고 있다.’

라르스는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녀석은 서서히 내 성격을 알아가고 있었다.

“중요한 뉴스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라르스가 내가 자는 동안의 소식을 추려서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나는 뉴스를 살피다가 눈을 찌푸렸다.

‘앙귀스 레지나의 콘서트…….’

이 상황에서 콘서트라고?

내 시선이 멈춘 걸 느낀 라르스가 설명을 내뱉었다.

“쟈파 상사 소속의 아이돌…… 이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분쟁 중에 콘서트라니 제정신이 아닌 듯하군요.”

라르스는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낯선지 머뭇거렸다. 나도 한낱 춤추고 노래하는 여자에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그래, 미쳐도 제대로 미친 여자로군.”

나는 중얼거리며 콘서트 일정을 살폈다.

……오늘 오후였다. 지금부터 여덟 시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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