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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이 카르티카는 우수하다. 생도 시절에도 나는 그의 재능을 나보다 윗급으로 생각했었다.
음,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내가 아등바등 노력할 적에, 일레이는 설렁설렁하면서도 나와 비등한 성취를 이뤄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일레이는 본인의 능력도 출중하고, 자신을 받쳐줄 배경도 단단하게 있었다.
‘그리고 제국에 어울리는 담력과 비정한 인간성도 갖추고 있지.’
일레이는 나보다 더 제국에 잘 적응할 인재다. 그런 그가 제국의 중심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녀석은 그간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과 심장이 찢어질 듯한 탄식도 경험했을 터다. 온갖 끔찍한 음모를 헤쳐나왔겠지.
일레이 카르티카가 쌓아온 이야기는 두꺼운 책과 같다. 가볍게 훑는 정도론 그 내용을 알기 힘들다.
나는 의자에 깊게 기대며 바바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우웅.
우리가 탄 우주선은 관광선처럼 느릿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일레이가 언제부터 제국의 칼에 손을 뻗쳤는지는 나도 몰라. 제국 내부에 있는 조직 간부는 사실상 일레이의 수하였어. 웃긴 건 간부들조차 자신이 일레이 휘하에 있다는 걸 모르는 상태였지.”
바바라가 단내 나는 음료를 빨대로 쪽쪽 빨며 말했다. 그녀는 다리를 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위이잉.
바바라의 의사를 투영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실낱같은 홀로그램이 바바라의 생각을 따라 면과 선을 이뤘다.
바바라는 자신의 사고를 디지털로 표현하는 데 능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전자전 전문가다웠다.
바바라의 홀로그램은 제국의 칼 조직도를 그려냈다. 노바스 행성의 지도가 나오고, 지역마다 조직의 간부를 상징하는 점이 찍혀 있었다.
제국령에 찍힌 점은 상당수 일레이에게 관계도가 쏠려 있었다.
“조직의 맹점을 찌른 거야. 내가 정체를 숨기듯, 일레이도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면서 조직 내의 세력을 넓히며 침투한 거지.”
나는 눈을 찌푸리며 생각을 정리하고선 입을 열었다.
“애초에 조직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느슨했어. 보안이 중요하다지만 서로에게 비밀도 지나치게 많고.”
“바보 같아 보여도, 제국의 감시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는 형태야. 연결고리가 촘촘하게 있으면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거든. 한 명이라도 잡히는 순간, 소탕이 시작되지.”
바바라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제국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정보’를 뽑아낼 수 있으니까.
“뭐, 어쨌든 제국 내부의 구성원이 일레이의 통제에 있었다면…… 봉기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셈이로군.”
제국의 칼 조직원들은 여러 이유로 조직에 합류했으나 목적만큼은 하나였다. 정통성이 불안정한 현 황제 이반 크라치아를 타도하는 것. 이를 위한 궐기와 봉기는 필수였다.
“제국 내부에서 일제히 봉기하는 게 가장 중요해. 외부에선 순차적인 게릴라만 해도 효과가 있거든. 이대로라면 일레이의 판단에 따라 거사의 판도가 바뀌는 거였지.”
나는 이야기를 듣고선 일레이의 행적을 추측했다.
일레이는 이반 크라치아 밑에서 미묘한 주종관계를 유지했을 터다.
‘일레이는 이반의 해결사 노릇을 하면서도, 이반의 뜻대로 모든 정황이 돌아가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방해했겠지.’
이반은 일레이가 거슬렸겠지만, 일단은 ‘이득’이 컸기에 놔뒀을 것이다. 일레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다.
‘그리고 일레이는 제국의 칼 동태를 살피다가 이용할 만한 조직이라고 생각했을 터.’
일레이는 슬금슬금 영향력을 발휘해 제국의 칼에 자신의 사람을 집어넣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침투한 자들조차 자기 자신이 일레이의 수하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제국의 미래를 위한 봉기를 준비했을 터다.
‘밑사람을 속이고 또 속이는 것. 제국의 위정자다운 짓이지. 참 잘 배웠어, 일레이.’
일레이는 상황에 맞춰서 제국의 칼 봉기를 돕거나 혹은 진압했을 것이다.
‘바바라에게 일레이의 개입은 곤란하지.’
바바라는 네메시스와 제국의 칼, 양쪽에 발을 담근 인물이다. 그녀는 궐기의 시기를 자신의 뜻대로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바라, 네가 날 구하러 온 것도, 제국의 칼 주도권과 관련이 있군.”
“맞아. 일레이가 제국령 내부의 간부 명단과 통제권을 넘겨주기로 했어. 이번 작전은 일레이의 죽음을 전제한 거야. 용감한 네 친구는 무쉬르 알 카슈라와 함께 우주의 먼지가 될 생각이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레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걸 내던지며 여기에 왔다.’
나도 그럴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말로 직접 들으니 감정의 흔들림이 더욱 커졌다.
“일레이를 죽게 놔두고 나와 둘이서 탈출하는 게, 네 입장에서도 최선이었겠네.”
“네가 내 출생의 비밀이니 뭐니 떠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야. 솔직히 꽤 궁금했거든. 호기심이 거사를 망쳐버린 셈이지.”
바바라는 간식 봉지를 꺼내더니 툭 하고 뜯었다. 그녀는 쿠키를 입에 물고선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하지만 호기심만이 내 고집을 들어준 이유는 아니겠지.’
바바라는 복잡한 인물이다. 지젤에 대한 집착적인 감정, 그리고 나에 대한 애증이 그녀의 결단을 끌어냈을 터다.
나는 카슈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내뱉었다.
“카슈라는 기술 이전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정, 그러니까 유전자 씨앗을 제국이 넘긴 적이 있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너인 거지.”
난 머릿속에 맴도는 사견을 덧붙이진 않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카슈라의 자식은 바바라 하나만 있는 게 아니겠지. 하지만…… 카슈라 같은 특이한 정신적 기질을 가진 사람은 바바라가 유일하거나 몇 없었을 거야.’
유전자가 있다고 독특한 기질을 무조건 이어받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였다.
내가 본 무쉬르 알 카슈라는 우연의 산물이었다. 특이한 기질을 가진 인간이 혼돈으로 그득한 시대를 살아가며 다중 뇌 사용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카슈라는 특이한 사례일 뿐이다. 제국에서도 인위적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겠지.’
무쉬르 알 카슈라의 다중 뇌 사용 사례는 정신적 면모가 중요했고, 그 정신의 방향성은 제국의 통치와도 맞지 않았다. 카슈라 같은 인간이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건 필연이다.
바바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듯했다.
“……재밌네. 비어있는 여백에 조각이 딱 맞게 들어가는 느낌이야. 너 같은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사소한 일에도 이런 기분을 느끼겠지?”
“뭐, 그렇지.”
난 어깨를 으쓱했다.
바바라는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멍하니 천장을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야, 루카. 일레이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나와 은거해. 우리 둘이서 지젤의 귀환을 기다리는 거지.”
“지젤의 행방도 모르면서 돌아올 거라 확신하는 건가? 우습네.”
“그러니까 지젤은 더욱 안전한 거야. 너란 존재를 묶어둘 수 있는 지젤을 찾는 사람이 많아. 그런데도 그 누구도 지젤을 찾지 못했지. 아주, 만약, 만약에 말이야. 지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세상을 부숴버리면 그만이야.”
바바라가 시선을 내리더니 밝게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환하게 빛났다.
“……네게 지젤은 어떤 존재인 거지?”
“넌 몰라도 돼.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을 거야. 나만 아는 보물의 가치를 굳이 타인에게 말해야 할까? 이 감정은 나만 알면 되지,”
바바라가 몸을 떨며 웃어댔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굳게 다물었다. 바바라의 감정을 멋대로 추측해 자극할 필요는 없을 터다.
‘아마도 바바라는…….’
내게도 짚이는 게 있었다.
나 역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듯한 괴물들과 맞닥뜨리며 그들의 심리와 사고를 읽어나간 탓이리라.
쌓여가는 경험이 내 사고의 폭을 넓혔다.
‘……불순물.’
헤일라스의 조언이 떠오른다. 그가 남긴 말은 통찰력이 있었다. 헤일라스 본인도 수많은 사례와 괴물을 관찰하여 얻어낸 결론일 테니까.
“제안은 고맙다, 바바라. 하지만…… 역시, 난 일레이의 파멸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바바라는 그냥 던져본 말이라는 듯이 무미건조한 미소만 지었다.
“우리의 만남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네. 유언으로 지젤에게 남길 게 있으면 말해. 전해줄 테니까.”
“뭐, 미안하다고 말해줘. 그게 전부야. 혓바닥이 쓸데없이 길면 오히려 내 유언이라고 믿지 않을걸.”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아광속 엔진을 작동할게.”
나는 의자 뒤편에 걸려 있는 헬멧을 꺼내 들었다.
* * *
아광속 엔진을 작동한 우주선은 단숨에 노바스 행성에 이르렀다.
치익, 칙.
노바스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바라는 강습포트에 몸을 맡긴 채로 우주선에서 멀어졌다.
우우웅.
내가 탄 우주선은 자동항행에 따라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텅, 텅.
대기권 진입으로 인해 우주선에선 철판을 두들기는 듯한 소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래도 잡음 말고는 고요했다. 오히려 적절한 소음 덕분에 사고가 더 깊게 가라앉았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난 이반 크라치아가 기다리는 제도 아크바란으로 간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 결정으로.’
나는 보더시티에서 깨어난 직후, 제국을 늘 피해 다녔다.
내가 작정하고 몸을 숨긴다면 제국조차 날 찾기란 어렵다.
나, 루카우스 쿠스토리아가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건 당연했다. 그간의 내 판단과 행동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제국은 내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첩보와 감시 자원을 낭비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일레이 카르티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 때문에 ‘한낱 소년’으로 돌아갔다.
황제 이반 크라치아는 제국의 공적 자원을 내게 사용했다.
이 흐름으로 이익을 본 사람은 누구인가?
‘키누안이지.’
일레이의 임무 중 하나가 키누안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반도 키누안의 행방에 제국의 이목을 사용했었다.
‘내가 보더시티에서 깨어나고 활동하면서…… 키누안을 추적해야 할 제국의 전력이 내게 분산됐다. 촘촘한 제국의 추적망이 흐트러지면서, 키누안이 움직일 수 있게 됐어.’
더군다나 나는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이권과 관계를 만들어내며 혼란을 야기했다.
‘이래선 폭풍기와 다를 바 없다. 똑같은 흐름이야.’
내가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며 이목을 끄는 동안, 키누안은 유유자적하게 목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쉬르 알 카슈라의 첫 번째 합일 후보는 키누안이었다. 더 적합한 내가 등장하면서…… 카슈라는 키누안에게서 눈을 뗐다.
‘내가 무대에 나타나면서 키누안은 제국과 카슈라의 추적에서 벗어났어.’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야 보이는 흐름이었다.
키누안의 아키에스 빅티마 주특기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로 관조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작은 힘’만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흐름을 비틀었다.
키누안은 개인의 역량으로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누구보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잘 활용하는 사내가 키누안이다.’
키누안은 당연하게도 황제보다 많은 힘을 가진 적이 없다. 심지어 지금은 일레이 카르티카보다 영향력이 적을 터다. 무쉬르 알 카슈라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키누안은 약자다. 여유만만한 척하지만, 실상은 매번 필사적으로 사고하며 자신의 판단이 정답이길 간절히 기도했을 거야.’
아키에스 빅티마의 달인은 언제나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자신에게 유리한 흐름이 올 때까지 납작 엎드리며 기다렸다. 제자인 내 앞에서도 그러했지.
키누안은 약자의 위치에서 강자들이 이뤄낸 흐름을 이용했다.
스륵.
나는 눈을 떴다.
키이이잉.
아무런 조작이 없었는데도 우주선의 동력이 멈추고 있었다.
우주선 전면의 창에선 제국의 정찰기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치직, 칙.
우주선의 통신이 강제로 열리고 있었다.
-제국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나는 아크레시아 제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