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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이어진다. 난 이대로 잠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조금씩 빛이 보인다.
가끔 약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어둠에 잠기고 싶다. 모든 걸 잊은 채로 편해지고 싶다는 충동이 내 의식을 밑바닥으로 잡아끌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깜빡, 깜빡.
난 눈꺼풀을 움직이며 흐릿한 초점을 잡으려 했다.
시야가 뚜렷해졌고, 눈동자를 굴려서 둘러보니 비정상적인 괴물들만이 있었다.
금속 상자만 남은 무쉬르 알 카슈라.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댄 일레이의 레기온.
그리고 안드로이드를 조종하는 마녀 바바라.
그 세 명은 깨어난 나를 응시했다. 금속 상자 속의 카슈라도 카메라든 뭐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날 보고 있겠지.
‘아…….’
나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과 혀를 움직이는 법을 잊은 듯이 구강의 움직임이 엉성했다.
‘뇌 손상이로군.’
허우적거리는 내 입을 본 일레이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필담으로 이야기해.
일레이가 그리 말하며 전자 패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 손가락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병신이 따로 없네.’
신체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의체의 연결도 원래 엉망인지라 지금의 뇌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치직, 칙.
카슈라의 금속 상자에서 기계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의 뇌는 몇 번이고 찢어졌다가 아문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만성적인 기능 저하가 일어나고 있었죠. 기능 상실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번엔 실어증이군요.
카슈라가 설명했다.
내가 기절한 동안, 저 세 명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 도리는 없다.
그래도 쓰러지기 직전의 내 부탁을 일레이가 들어준 모양이다. 내 언질이 없었다면 일레이는 카슈라의 금속 상자를 바로 부쉈을 터다.
일레이의 입장에선 카슈라를 즉결 처형해야 할 인물이다. 카슈라는 깊이를 알기 힘든 자이고, 설사 제압했더라도 살려두는 것 자체가 꺼림칙한 존재였다.
-제 은신처 안쪽에 설비가 있습니다. 제대로 조율을 마친다면 루카도 손을 움직일 수 있겠죠.
카슈라가 이어서 말했다.
일레이와 바바라의 안드로이드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근거리 무선 통신으로 뭐라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경고하는데 허튼짓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무쉬르 알 카슈라. 오랜 삶을 허무하게 마감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일레이가 경고하더니 카슈라의 금속 상자를 바닥에 질질 끌며 이동했다.
카슈라의 금속 상자는 무력했다. 금속 상자와 연결된 각종 장비는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통신 장비도 뜯겨서 네트워크 연동이 끊어졌을 것이다.
카슈라에게 남은 건 생명 유지 장치 정도였다.
-저는 루카와의 내기에서 졌죠. 두말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금속 상자의 카슈라가 말했다.
……난 카슈라의 근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합일 직전까지 갔기 때문일 것이다.
‘카슈라는 여러 뇌를 거치고 통제하면서도 자아를 유지했다.’
카슈라에게는 기이하고도 비정상적인 자기 확신이 있다.
‘내뱉은 말과 약속을 쉽게 철회할 사람이라면, 저렇게 다중 뇌를 통제하지 못해.’
놈은 ‘무쉬르 알 카슈라’라는 정체성 유지를 위해 자신만의 질서를 정했을 것이다. 그걸 어기는 순간, 놈의 자아는 힘없이 무너지겠지.
‘물리적 정체성이 없는 만큼, 카슈라에겐 내면의 서약이 중요하다.’
바바라의 안드로이드가 나를 안아 들었다. 내 팔다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일이 복잡하게 됐네, 루카. 그냥 나와 탈출했다면 좋았을 텐데.
바바라가 안드로이드를 통해 말했다. 어차피 난 대답할 방도도 없기에 침묵했다.
금속 상자의 카슈라는 정비실로 우릴 안내했다.
-루카의 의체 조율부터 하겠습니다. 제 안전을 위해서라도 루카의 의사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니까요.
카슈라의 말을 들은 일레이가 바바라에게 눈짓했다.
-바바라, 네가 루카의 의체를 조율해. 카슈라에게 맡기는 것보단 낫지.
-요즘에 다들 날 부려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 웃겨.
바바라는 칭얼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녀는 날 눕히더니 엉망으로 연결된 의체를 먼저 분리했다. 내가 눈을 굴려보니 무리한 결합으로 인한 조직의 괴사와 출혈이 검게 보였다.
바바라는 카슈라에게 의약품 위치를 묻더니 의료조치를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묘한 상황이었다. 바바라, 카슈라, 일레이가 한 공간에 있었다.
-손가락부터 구부려봐.
바바라는 의례적인 말을 내뱉으며 신경계를 점검하며 의체 조율을 도왔다. 재연결된 의체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오른팔이 연결되자마자 전자 패널을 받아들고선 글씨를 적으려 했다.
‘무엇부터?’
내 머릿속엔 의문이 많았다. 그중에 가장 큰 질문이 있었다.
일레이는 무얼 희생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그러나 일레이가 당장 질문에 답하진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카슈라도 여기에 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 네 능력으로 내 회복을 도울 수 있는 건가?
내가 전자 패널에 글씨를 적어서 내밀었다. 카슈라의 웃음이 벌써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루카.
카슈라가 흔쾌히 답했다.
카슈라는 즈벨리의 기억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가 잃은 건 즈벨리의 뇌가 가진 물리적 기능뿐이다.
‘즈벨리는 키누안의 스승이며 아키에스 빅티마의 달인이다. 카슈라 본인도 뇌에 정통하고.’
카슈라가 내 뇌의 기능 회복을 도울 수 있다는 합리적인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임시방편으로 고치는 게 고작입니다. 아키에스 빅티마든 레기온이든 뇌를 소모품으로 사용하죠. 뇌를 계속 쓰고 싶다면, 소모 자체를 줄여야 할 겁니다.
난 전자 패널에 글자를 휘갈겼다.
-그건 네가 걱정할 사안이 아니지. 넌 패자이고, 난 승자야.
나는 패널의 글자를 이어 쓰며 바바라와 일레이에게 내보였다.
-카슈라에게 내 수술을 맡겨.
바바라의 안드로이드에선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고, 일레이는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진심이야? 네 뇌를 노리던 놈이야. 차라리 다른 의사를 찾아.
-카슈라보다 적임자는 없어. 그리고 놈은 날 건드리지 못해. 카슈라라는 망령이 세상에 붙어있기 위해선 저주가 필요하지. 자신의 영혼을 현세에 옭아매는 저주를 스스로 깨뜨리진 않을 거야.
나는 길게 적어가며 카슈라의 금속 상자를 보았다.
난 카슈라에게 내 뇌를 맡길 생각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신 나간 짓이다.
콰직!
일레이는 주먹의 밑부분으로 벽을 때렸다. 내부가 흔들리면서 타일이 부서졌다.
-멋대로 해라, 망할 자식아.
일레이의 날카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 * *
카슈라는 내 수술의 집도를 맡았다. 일레이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설사, 카슈라가 수작을 부린다고 한들, 뭐가 문제인지 일레이는 모를 테니까 말이다.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카.
카슈라의 금속 상자는 전선과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었다.
기잉, 기이잉.
카슈라가 통제하는 의료용 로봇팔이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기이잉, 드드득.
머리를 여는 소리가 섬뜩하다.
나도 내 두개골을 여는 일에 저항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생물의 본능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스륵.
난 팔을 움직여 전자 패널에 글자를 적어갔다.
-키누안은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지? 한계에 진작 도달하지 않았나?
내가 격렬하게 살아왔다 한들, 키누안의 삶에 비하면 짧다. 나조차도 뇌가 엉망진창인데 키누안은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계에 달한 상태로 꾸역꾸역 버티고 있죠. 어쩌면 그저 타고난 뇌의 강도가 남다른 걸 수도 있습니다.
-네가 모르는 게 다 있군.
-그렇기에 키누안은 위험한 인자였죠. 키누안과의 합일은 제게 일생일대의 도전이었을 겁니다. 키누안은 제게 있어서 독이 든 성배와 같습니다.
……여기서 내 의식이 잠시 끊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아직 로봇팔이 내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아, 음…….”
난 언어 기능이 회복된 걸 느꼈다. 말이 생각대로 나오고 있었다.
-괴사한 부분을 제거하고, 자극을 줘서 언어 중추의 끊어진 부분을 재연결하고 활성화했습니다. 가끔 머릿속의 단어나 문장이 입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더듬거리며 막히는 느낌이 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겁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소리를 내었다.
“명의로군.”
-흠, 벌써 어휘 선택이 훌륭하군요. 뒷일은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난 두개골이 닫히는 걸 느꼈다. 수술은 끝났다.
카슈라의 솜씨는 우수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내 머리카락의 일부만 자르고도 뇌 수술할 정도였다.
나는 이마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일레이와 단둘이 마주했다.
-루카, 더는 카슈라를 살려둘 이유는 없겠지?
나는 일레이의 기계음에서 예민한 감정선을 느꼈다.
‘일레이의 뇌도 한계에 달하고 있다.’
일레이는 레기온을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었다. 그도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리고 있을 터다. 본디 레기온은 단기사용을 전제로 만들어진 의체니까.
“그렇다고 카슈라를 여기서 죽일 이유도 없지.”
-장난해? 역시 뇌 수술 중에 뭔가 당한 모양이로군! 빌어먹을!
일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평소보다 성급했다.
“진정해. 미친 말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카슈라의 속성을 이해했어. 놈에겐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아. 감정적 증오나 분노 따위도 없지. 철저히 자기만의 질서로 움직이는 존재야. 우리에게 패배했다고 해서…… 복수를 계획하지도 않아.”
-루카, 너 정말로 정신이 나간 거냐? 내가 어떤 각오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
일레이가 감정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이건 좋은 신호였다. 저런 감정적인 태도마저 사라지는 게 더 위험한 상태다.
“키누안이 바라는 건, 카슈라와 내가 충돌 끝에 둘 중 하나가 소멸하는 거야. 하지만 여전히 카슈라와 내가 별도의 존재로 남아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카슈라의 다음 목표는 내가 아니라 키누안이다.”
나는 양손의 엄지를 부딪치며 눈을 감았다.
‘키누안이 날 현실로 불러낸 까닭…….’
점점 난 키누안의 사고에 접근하고 있었다.
키누안의 의도든 뭐든 간에, 나는 키누안을 현실에서 간파해 제압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내 안의 키누안이 한결 작아졌다. 심리적 압박으로 억눌렸던 시야가 넓어지면서 새로운 조각이 내 머릿속의 늪에서 떠올랐다.
“일레이, 넌 이대로 제국에 돌아가면 처형당하지? 넌 이반의 명령을 어긴 채로 군용 시설과 장비도 멋대로 사용했겠지.”
일레이는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나는 눈을 떴다.
“날 이반에게 데려가라, 일레이.”
-집어치워. 어차피 각오한 일이야.
“이반에게 가는 건 널 위해서가 아니야. 원래라면 내가 하지 않을 짓을 해야 해. 키누안은 내가 택하지 않을 선택에 비밀을 숨겨놨어.”
어두운 혼돈에 손을 과감히 집어넣어 빛을 건져내야 한다.
“넌 지금 레기온의 과부하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 그러니 이번엔 날 믿어. 내가 널 믿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