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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젊고 우수한 뇌가 여기에 있네.’
키누안이 날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카슈라에게 필요한 뇌는 키누안이 아니라 나다.’
카슈라가 키누안을 대신해 날 집요하게 노리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내가 더 젊다.’
나도 과부하로 인해 어지간히 엉망진창이지만, 키누안보단 상태가 나을 것이다. 그리고 뇌 구조에 정통한 카슈라라면 어떻게든 내 뇌를 보존해 쓸 수 있을 터다.
‘그리고 전투용으로는 내가 키누안보다 더 적합하다.’
카슈라가 필요한 건 ‘아키에스 빅티마의 전투 능력’이다. 진정한 의미로 아키에스 전투술을 요구하고 있다.
‘키누안이 할 수 있는 전투술은…… 나도 할 수 있다.’
이럴 때마다 나도 자기 자신이 우습다. 키누안이 내 스승이 맞긴 한가 보다.
나는 중요한 순간이면 키누안을 떠올렸고, 그가 무얼 했는지 상기했다. 인생의 기로마다 키누안의 언행은 내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키누안을 따라 한다.
‘직관, 그 너머의 영역으로.’
키누안은 내가 탄 이륜차를 권총으로 대파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솜씨의 저격과 예측이었다. 물리 세계의 인과를 휘어 잡아챈 듯한 예지였다.
그 단 한 번의 사격은 아키에스 전투술의 정수라고 할 만했다.
치지지직.
내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가 찢어지고 있었다. 현실이 고장 난 것처럼 느리게 흐른다.
‘사고를 더욱더 가속해.’
내 뇌는 현실을 길게 잡아끌며 시간을 악착같이 붙잡고 있었다. 내 상태가 좋았다면 체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꼈을 터다. 그러나 지금은 느리게 하는 게 고작이다.
‘충격탄은 세 발.’
세 발로 카슈라를 막아내야 한다. 아니, 이제 두 발이지.
이미 내 손가락은 첫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먹먹하게 퍼지고 있다.
충격탄 특유의 폭발이 카슈라의 어깨에서 터졌다. 카슈라는 보조 팔에 달린 방패를 펼쳐서 충격탄을 막아냈다. 그의 방패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에너지 폭발을 상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사격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고, 카슈라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일레이를 몰아세웠다.
‘몇 수를 앞서야 한다. 내 의식 속의 시간을 당겨와서 예측해야 해.’
미래를 본다는 건, 초능력의 영역이다. 말랑한 인간의 뇌로 미래를 물리적으로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물리 현상을 넘어서려면 초월적인 힘의 이끌림이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내겐 초상 현상을 일으킬 힘이 없다. 초능력은 먼 세상의 이야기다.
치직, 칙.
머리가 아프다. 억지로 잡아챈 시간이 서서히 내 의식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키누안도 내 이륜차를 저격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했었다. 그 정도 기예는 평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니 나도 한계까지 나를 몰아세워야 한다.
‘현재의 카슈라를 노려선 안 돼.’
미래의 카슈라를 봐야 한다. 내 머릿속에선 카슈라의 잔상이 수없이 보였다. 그가 1초 뒤에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을지에 대한 예상이었다.
저 수많은 잔상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심지어 내 개입으로 인한 카슈라의 반응이 또 다른 잔상으로 분화되었다.
끝없이 분화하는 잔상을 보니 암담해진다. 1초가 까마득한 미래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가능성은 무한했다.
‘이걸 어떻게 인간의 뇌로 계산한다는 거지?’
일반적인 부류의 군인이나 전사라면 내 예측의 범주 내에서 움직일 터다.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반사적’이고도 ‘기계적’인 행동과 판단에 의존해 싸운다. 사실상 그들의 전투법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류는 반사와 반응 영역에서 자신의 판단을 끼워 넣을 수 있다. 찰나의 영역에서 자유 의지를 비집어 넣는 것이다.
카슈라도 마찬가지다. 찰나에도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초인이다. 뻔한 예측은 통하지 않는다.
‘이대론 예측이 불가하다.’
나는 느려진 물리 세계에서 카슈라와 일레이의 격돌을 보고 있다. 맹렬하게 부딪힌 칼과 칼이 반발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칼날에 튀는 불티 하나하나의 개수조차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들도 사고를 가속해 체감 시간을 늘렸을 것이다. 사고의 깊이는 나와 다를 바가 없지만, 사고의 폭은 나보다 좁겠지.
아니, 카슈라는 나와 폭이 비슷할 거다. 놈은 다중 뇌를 이용해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시다발적인 고속 사고를 할 수 있긴 하다. 다만, 연결된 뇌들의 성능이 제각각이라 사고의 속도가 달라서 효율이 높진 않을 터다. 그런 식의 연동 사고는 가장 기능이 떨어지는 뇌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니 아키에스 빅티마로 단련된 단일의 뇌가 필요한 거지.’
내가 본 카슈라의 미래는 무한대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조건을 걸고 가능성을 제약해야 한다.
‘반대로 사고해.’
가장 확률이 높은 미래부터 소거했다. 우리는 상대의 예측을 피해서 움직이는 게 기본이다.
‘난 무쉬르 알 카슈라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생각해보자, 키누안도 언제나 날 믿고 있었다. 그는 폭풍기의 내가 황제의 예상을 뛰어넘는 혼란이 될 거라 믿으며 준비했다.
저번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속고 속이는 혼란 속에서 키누안은 내가 자신을 제압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무쉬르 알 카슈라를 그 자리에 불러온 것이다.
예지하려면, 적수의 위대함을 믿어야 한다.
무쉬르 알 카슈라, 일인군단, 전설의 용병.
인류의 다음 한 발자국에서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일지도 모르는 자.
놈이 내 ‘효율적인 공격’은 죄다 파훼할 거라고 믿자.
나의 믿음이 확률을 고정했다.
카슈라의 잔상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보는 카슈라의 잔상은 네 가지로 줄어들었고 그 형체가 진해졌다.
난 지금 훈련으로 쌓아올린 기계적 직관을 거부하고 있었다.
단련된 전투 사고와 직관으로 보자면, 저 잔상의 위치에 카슈라가 결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카슈라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택하는 확률의 사각지대.
치지지.
현실이 흐르고 있다.
나는 곧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그러나 아직 네 가지의 잔상이 남았다.
내 시야가 붉어지고 있다.
잔상이 남은 건, 아직, 내게,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어라. 내게 존재하는 ‘최선’ ‘최고’의 가능성을 전부 지워라. 내 전력이 전부 파훼 당한다고 생각해라.
예측을 예측하고, 파훼를 파훼하고, 평생을 쌓아온 전투 사고의 합리성에 정점에 이르렀을 때…….
‘고차원적인 합리성을 포기한다.’
지극히 단순하고도 일차원적인 판단을 사용한다.
난 평생 세상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늘 최악의 결과를 가정하며, 최악의 상황에 날 밀어 넣고 기어 올라왔다.
지금만큼은, 그 가치관을 버리자. 지금은 내 눈앞에 최선의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어라.
일류라면 절대 노리지 않을 ‘운에 기댄 최선의 상황’. 우리는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흐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가만히 있어도 내게 유리하게 상황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하는 건 바보들의 사고법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난 바보가 된다.
생각을 지우자,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쏜다. 카슈라는 등이 약점일 테지만, 내게 등을 내보이며 기동할 것이다.
기술의 무위, 사고의 공백, 확률의 허상.
황금빛 진리의 원이 내 머릿속에서 완벽한 곡률을 그렸다.
……세상은 돌고 돌아서 원점인 것이지.
카슈라의 잔상이 하나만 남았다. 그 잔상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 발 중에 두 발이 남았다.’
두 발까지는 필요가 없다.
‘한 발이면 된다.’
나는 빙글 돌면서 루이나를 왼손 하나로 쥐었다. 그리고 옷자락 사이로 총구를 숨기며 방아쇠를 당겼다. 불안정한 사격이지만…… 정교하게 목표를 노리는 것도 아니며 대충 맞아도 된다.
내 사격과 동시에 카슈라는 빙글 돌면서 물러났다. 놈이 짧게 회전하는 동안, 약점 중 하나인 금속 상자가 내 시야에 내보였다.
‘나는 금속 상자를 노리지 않았어. 내가 노린 건…….’
난 일레이의 비수가 뭔지 모른다. 그러나 일레이가 ‘마무리’해줄 거라고 믿고 행동했다.
난 일레이를 믿고, 카슈라를 믿었다. 불확실성에 몸을 던지면서, 내 역량만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 않았다.
우연과 운을 내 쪽으로 끌어온다. 우연과 운으로 난 카슈라를 쓰러뜨릴 것이다. 난 내가 계산하지 못하는 영역에 가능성을 기댔다.
나는 루이나로 카슈라의 다리를 노렸다. 놈의 다리는 장갑이 가장 두꺼웠다. 약점과는 거리가 멀고, 충격탄에 맞아도 손상을 입지 않을 터다.
하물며 카슈라가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있기만 해도, 내 사격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놈의 다리 하나가 살짝 떠 있다. 내가 금속 상자 대신에 다리를 쏠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카슈라는 뒤로 돌면서 발을 떼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균형의 축 중 하나가 뜨면서 놈의 균형이 불안정했다.
날아간 충격탄이 놈의 왼쪽 다리에 명중했다. 느릿하게 푸른 폭발이 일었다.
난 모든 효율적인 공격을 걸러내고, 무용에 가까운 공격을 감행했다.
‘일레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지금이다.’
충격탄이 카슈라의 왼쪽 다리에 맞아서 폭발했다. 폭음이 일면서 카슈라는 잠시 비틀거렸다. 놈이 이번 전투에서 자신만의 흐름을 잃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처음으로 승부가 났다. 일류의 싸움에선 흔한 일이다.
촤르르르!
일레이의 장검, 카타스트로피는 엄청난 속도로 가변했다. 칼날의 마디마디가 벌어지면서 이음새가 생기더니 채찍처럼 길게 뻗치며 복잡한 궤도를 그려냈다.
몇 번이나 수세에 밀려도 내보이지 않던 일레이의 비수였다.
늘어진 카타스트로피는 카슈라의 머리를 잘라냈다. 금속 상자와 연결된 관과 케이블도 칼날 채찍에 휘말려 끊어졌다.
칼날 채찍은 기이한 각도로 꺾이더니 카슈라의 팔과 다리도 휘감으며 순식간에 수축했다. 놈의 팔다리가 거짓말처럼 잘려나갔다.
카슈라를 감싼 칼날 채찍의 안쪽 부분이 붉게 빛나는가 싶더니 폭발도 연달아 일었다.
카아아아앙!
카타스트로피는 카슈라의 몸을 뱀처럼 휘어 감았다가 터졌다.
카슈라의 몸뚱이는 집중포화라도 맞은 듯이 찢어지고 터져나갔다.
키리리릭!
화력을 토해낸 카타스트로피가 장검 형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칼날은 이미 너덜너덜했고, 이음새도 늘어져서 무기로서 기능을 상실했다.
‘위력은 좋지만, 일회성이로군.’
특별한 일회성 기믹을 위해 돈을 쏟아부은 무기였다. 좋은 가문 출신에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일레이니까 저런 독특한 설계의 무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일레이의 전용무기, 카타스트로피.’
일레이는 은신처의 내구성 핑계를 대며 의도적으로 근접 결투를 청했다. 그 속내는 중거리와 원거리에 대한 감각을 적에게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결정적인 순간, 적이 거리 감각에 대해 방심했을 때를 노리기 위한 계략이었다.
일레이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이 공격만을 위해 전투를 끌어간 것이다. 카타스트로피의 본성을 꺼낼 기회가 있었어도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꾹꾹 참았겠지.
치이이이이.
카슈라의 전갑의체는 머리와 사지가 모두 잘린 상태였고, 몸뚱이에는 뱀에게 휘감긴 듯한 열상이 남아있었다.
기잉.
나와 일레이의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방금의 사격은 노린 거야? 아니면 운인 거야?
“둘 다. 그리고 카슈라를, 죽이지 마. 내가 깨어날…….”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의식이 얇게 접히고 있었다.
나는 초상 현상을 일으킬 힘이 없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진 못한다.
그러나 우연과 운에 기대는 영역을 필연으로 엮어내 현실로 끌어올 순 있다. 그게 아키에스 빅티마니까.
……뭔가, 알 것 같다.
신과 인간, 기적과 필연, 순리와 역천.
신 앞에서 인간은 약자이고, 기적이 없는 현실에선 필연에 기대야 하며…….
사고가 끝나기 전에 눈이 감기고 있었다.
일레이가 움직이며 내 앞으로 손을 뻗었다.
퉁.
레기온의 쇠붙이 손이 쓰러지는 나를 붙잡았다.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폭풍기의 막바지에서도 녀석이 나를 이렇게 부축했었지.
여러모로 신세를 지는구나, 일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