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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합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하나의 인격을 삭제하는 게 아니라 통합하는 것이다. 심지어 가치관과 성격조차 전혀 다른 존재끼리.
인격을 말살한다면 뇌도 기능 손상이 생길 터고, 무쉬르 알 카슈라는 원하는 뇌를 얻지 못한다.
그러니 합일을 위해서 유대감과 심리적 순응이 필요했다. 카슈라가 서둘러 내 뇌를 척출하지 않은 데도 전부 까닭이 있었다.
이렇게 모든 정보를 가진 채로 분석하면서 뒤돌아보면 뻔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알기 힘든 법이지.
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매번 깨닫는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아니다. 그저 나의 경험과 취합한 정보를 토대로 최적의 사고를 짜내는 인간의 방식에 불과하다.
포스 능력과도 같은 초상 현상도 아니고, 아케인 문명과도 같은 초월적인 기술도 아니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사람의 기술이다.
아키에스, 통찰, 빅티마, 약자.
약자가 강자를 꺾기 위한 하나의 방편, 그 비수가 아키에스 빅티마다.
내게 합일에 대한 정보나 기반 지식이 있었다면, 카슈라의 노림수를 알아챘을 수도 있다. 놈의 간절한 친절이 나를 굴복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걸 알아채고 마음을 쉽사리 열지 않았겠지.
‘이미 늦었다.’
마음이 기운 건 되돌릴 수 없다. 난 합일에 순응하고 말 것이다.
나는 무쉬르 알 카슈라를 인정했다. 완전한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마음 한구석의 빈틈을 내주고 말았다.
지금에 이르러서 저항한들, 나의 피상적인 반항은 덧없이 흩어지겠지.
카슈라는 내 심리 방벽이 무너지기만을 간절히 기다린 것이다.
‘제국의 정찰기와 내 돌발 행동으로 인한 표류…….’
이게 카슈라의 계략은 아닐 터다. 그도 예상치 못한 위험과 고난을 겪은 것이다.
그러나 카슈라는 역경을 기회로 만들었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 간절한 회유가 내 마음을 열어젖힌 셈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연애를 하는 것 같군. 우습기 짝이 없다. 뭐, 근본적인 원리로 따지면 연애와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염병할. 그럼 내가 공략을 당한 처지인 건가?
생각하면 할수록 혀 깨물고 뒈지고 싶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빌어먹을. 혀 깨문다고 사람이 죽을 수만 있다면 진즉 했다.
덜컹, 드르륵, 덜컹.
카슈라의 우주선은 불안한 소음을 내뱉으며 검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선장은 무쉬르 알 카슈라이고, 나는 그의 포로일 뿐이다.
“여긴 소행성지대입니다. 어지간해선 이쪽으로 항로를 잡는 경우가 없죠.”
카슈라가 모니터로 외부 정경을 보여주며 말했다. 자잘한 소행성이 무리를 이룬 채로 일정한 궤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넌 타인의 뇌를 그리 삼키고 내뱉으면서…… 무쉬르 알 카슈라의 삶을 이어가고 있지. 도대체 무얼 위해 그런 괴물이 된 거지?”
내가 초췌하게 말을 내뱉었다. 정보를 캐내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말이나 내뱉고 싶었다.
마음이 꺾인다는 건 이토록 비참한 일이다. 무쉬르 알 카슈라는 진정한 의미로 내게 첫 패배를 안겨준 상대다.
내 육체와 정신은 둘 다 꺾여버리고 말았다.
문득, 보육원에서 봤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거센 폭풍은 여행자의 외투를 날리지 못했다. 그러나 햇살은 여행자 스스로 외투를 벗게 했다.
난 스스로 무장 해제를 했고, 카슈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루카, 당신은 제게 거창한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제게 멋진 대의가 있다면 감화되어 더 적극적으로 합일을 하실 겁니까?”
“글쎄.”
비꼬는 게 아니다. 그냥 진심으로 모른다는 의미다.
“나이거 행성계 바깥엔 우리로선 대적이 불가능한 악몽이 있습니다. 재해와도 같죠. 돌도끼를 든 선조들이 맞닥뜨린 대홍수처럼, ‘외적’은 우리의 힘으로 어쩌지 못할 우주적 재앙입니다. 위정자들조차 할 수 있는 건 그 존재를 필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뿐이죠. 제거할 수 없는 공포를 얄팍한 장막으로 숨기고 있습니다. 모두가 미쳐버리기 전에요.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메멘토 모리를 거부하고, 우린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이듯이 말이죠. 어쩔 도리가 없다면 때론 잊어야 인간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 수 있습니다.”
예전의 나라면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깨졌기에 더 깨질 것도 없었다. 마치 남 일처럼 덤덤했다.
“그래서? 그 외적과 네가 상관이라도 있다는 건가?”
“제가 그 외적을 연구하며 막을 방법을 찾는 자이며, 그림자에서 활동하는 결사의 영웅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합일을 납득하겠습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넌 그런 위인이 아니야, 결코.”
난 카슈라를 이제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물이다. 대의와 국가, 사회,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
‘최고의 에고이스트.’
카슈라가 수많은 뇌를 거치고도 자아의 중심을 잃지 않는 까닭일 터다.
“당신은 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이지요. 저라는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너는…….”
“너는?”
카슈라가 안광만으로 호기심과 기대라는 감정을 드러냈다. 나니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본디 전갑의체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안면 근육조차 없기 때문이다. 전갑의체를 과용하면 감정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는 까닭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카슈라의 안광만으로 그의 복잡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 생겼다.
“……그저 멋대로 오래 살고 싶은 거겠지. 그 어디에 속하지 않고도 에고이즘을 실현할 힘을 거머쥔 채로.”
카슈라는 내 추측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을 터.
놈의 다중 뇌에선 도파민이 치솟을 터다. 그의 후두부에 달린 관에서 액체가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누군가는 제가 살아있는 게 아닌 망령이라 생각하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제가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노바스 행성에 정착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켜봤죠.”
우주선의 엔진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속도도 느려진 게 느껴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우주선은 소행성지대에 돌입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자칫하면 소행성에 부딪혀 허무하게 우주의 먼지가 될 수도 있다.
“하하, 그만치 살았으면 죽어야 순리에 맞지 않겠어?”
“루카, 지성이란 순리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선조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불을 피우고,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이 없었기에 돌을 깎아 창과 칼을 만들었죠. 이윽고, 우린 삶과 죽음이란 순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성을 폭발시키듯 추상적으로 활용해 상상의 장소, 천국과 지옥 따위를 만들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을 빌려서 말이죠. 당장 죽음을 물리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니, 죽어도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저승이란 개념을 창조했죠.”
“늙으면 다들 선생질을 하고 싶은가 보군.”
나는 괜히 라그나타가 생각나서 키득키득 웃었다. 내 말에도 카슈라는 개의치 않았다.
“우린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우주의 순리를 거부할 힘을 거머쥐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인류의 거대한 도약이며 최초의 실험들 중 하나일 뿐이죠. 인류는 머지않아 물리적으로 죽음을 극복할 겁니다. 상상력에 기댄 추상적인 천국과 지옥을 버리고, 현세에서 삶의 영속성을 거머쥐겠죠. 루카, 루카, 당신의 입에서 불로불사는 의미가 없고, 영원한 삶은 허무하다는 고리타분한 말이 나오지 않겠죠?”
보육원에서 본 동화가 또 떠올랐다. 은근히 나도 동화책을 제법 읽은 모양이다. 보육원 시절의 루카는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우의 신 포도지.”
내 말을 알아들은 카슈라가 안광을 크게 떴다.
“가지지 못하는 것을 두고 ‘쓸모없다, 불필요하다,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는 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불로불사와 영원의 무의미를 논하려면, 그 이전에 그걸 가져봐야 하죠. 여우는 나무에 달린 포도를 먹지 못해 신 포도라고 비난했지만, 실제론 아주 달콤했을 겁니다. 풍기는 단내만 맡아봐도 알 수가 있죠. 영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부 물어보면 알죠. 불로불사의 기회가 있다면 거부하겠느냐라고요. 과연, 누가 영생을 거부할까요? 불멸이 달콤하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말이죠. 전 신 포도를 믿지 않는 여우입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할 때, 진실을 말하는 자죠.”
“난 제국의 귀족을 보았다. 고작 200년도 살지 않았는데 인간성이 무너지고 있지. 우리의 정신은 불로불사에 맞지 않아.”
“그건 영생의 결함이 아니라 전신의체의 결함입니다. 유일한 생체 부위인 뇌의 변질과 노화를 막지 못한 거죠. 생물학으로 뇌가 버티지 못한 겁니다. 불로불사가 정말로 허무하다면, 그때 가서 논하면 됩니다. 일단은 거머쥐고 나서요.”
정론이로군.
우우우웅.
우주선은 소행성 하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돌덩어리가 아니라 인위적인 건축물이었다. 외부를 암석으로 덧대서 소행성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소행성으로 위장한 은신처의 외벽이 열렸다. 카슈라의 우주선과 딱 들어맞는 정박장이 나왔다.
카슈라의 우주선이 착륙했다. 그러나 카슈라는 바로 내리지 않았다. 그가 움찔하며 모니터 너머를 응시했다. 복잡한 센서 표기에서 노란색 경고가 떠올랐다.
“루카, 세상엔 업보라는 게 있습니다. 카르마라고도 부르죠.”
“업보? 그런 것도 믿고 있었나?”
“업보는 믿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업보란 선악의 인과죠.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업보란 물리적 인과율이며, 우주의 인과는 너무나 복잡해 우리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카슈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드론이 나타나더니 그의 금속 상자를 열고 뇌를 하나 교체했다.
‘전투용 뇌를 넣고 있다.’
뭐든 간에 즈벨리의 뇌보단 성능이 떨어질 터다.
“당신의 인과는 놀랍군요. 고작해야 이십여 년의 짧은 삶으로 짊어진 업이, 제 업을 잡아먹으려고 들다니 말이죠.”
우주선 전방 카메라의 모니터가 켜졌다. 정박장 끄트머리는 어둡다. 그러나 한 쌍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는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왔다. 그는 국가들의 음모와 계략에서도 자신의 존재와 비밀을 유지하고 버텼다.
카슈라의 은신처는 노바스 행성, 아니 나이거 행성계에서도 대단한 비밀일 터다.
그 비밀을 단시간에 알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자원과 희생이 필요할까? 난 모른다. 가늠도 되지 않았다.
철컥, 철커덩.
안광의 존재가 정박장 안쪽에서 우주선까지 걸어오고 있었다.
‘레기온.’
레기온이 어둠을 부수듯 걸어 나왔다. 검붉은 근위대의 망토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마냥 묵색인 그림자 레기온이 아니었다. 근위대 기반의 레기온은 묵직하고도 화려한 검붉은 도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레기온이었다. 근위대 레기온은 표준 모델들이 있긴 해도, 무장이 제각각이라 개성이 있었다.
그러나, 카슈라가 말한 업 때문일까. 아니면 아키에스의 직관 탓일까.
나는 저 레기온이 누군지 알았다.
‘……일레이, 일레이 카르티카.’
일레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나를 위해 우주를 가로질러 여기에 있을까.
“카르티카의 여우께서 오셨군요.”
전투 준비를 마친 카슈라가 우주선에서 내리며 말했다.
정중하게 약속한 결투라도 하듯이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끼릭.
레기온의 모습을 한 일레이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기이잉.
그리고 일레이의 헬멧 앞부분이 길어지며 닫히더니 여우 가면처럼 형태가 변했다.
컨셉 한번 더럽게 충실하군.
“허, 참.”
어처구니가 없게도, 나는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