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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75

275
흔히 우주를 바다와 빗대기도 한다.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지만,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단 한 가지의 공통점만 말하면 된다.

‘우주든 바다든, 표류할 수 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처참한 우주선 실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무쉬르 알 카슈라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의 전갑의체는 전력을 아끼듯 미동도 없었다.

카슈라는 머리만 움직여 날 보았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루카. 먼저 죽는 건 당신입니다.”

“나 혼자 죽을 바에 너라도 데려가는 게 낫지.”

난 구석에 처박힌 채로 말했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누군가 날 밤새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진짜 뒤지겠네.’

최악의 몸 상태였다.

귀는 먹먹했고, 코와 눈에선 피가 흘렀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아광속 비행의 후유증이었다. 우주복 없이도 이 정도 손상으로 끝난 걸 보니 카슈라의 우주선은 상당히 최첨단인 듯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군요. 당신은 죽는 게 아닙니다. 저와 함께하는 것이죠. 고통이나 이질감 없이 저흰 자연스레 의식을 공유할 겁니다.”

“‘루카’가 아니라 ‘무쉬르 알 카슈라’가 되는 거지. 그게 바로 죽는다는 거다. 너처럼 똑똑한 놈이 오래 살면, 너무나 당연한 걸 놓치곤 하지. 남들과 상식이 어긋나니까 말이야.”

카슈라는 침묵했다. 그의 안광이 너울너울 얕게 흔들렸다.

“……당신 입장에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로 말이죠. 언어로 루카의 존재를 규정하고, 당신의 의식은 연속성을 유지할 겁니다. 그럼 죽음이 아니라 단지 변화하는 거죠.”

나는 눈을 찌푸렸다.

“말장난은 불쾌하군.”

“감정적 직관에 휘둘리지 말고 본질을 보셔야 합니다. 제가 감정적 직관에 따라 행동했다면…… 당신은 이미 제 손에 갈기갈기 찢겼을 테니까요.”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기이이이.

통제실의 중력 제어 장치가 꺼지면서 내 몸이 살짝 떠올랐다.

“네 우주선도 맛이 가고 있군. 일이 상당히 꼬인 모양이지?”

나는 시시덕 웃었다. 놈이 열받길 바라지만…… 나도 안다. 놈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감정 통제에 능했다.

‘그러나 놈에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야.’

무쉬르 알 카슈라는 다른 의미로 비인간적이었다. 초인에 가까운 인내심과 이성을 가졌다. 인간이 가져야 할 불순물과 불필요한 아집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카슈라는 나쁜 의미로도 초연했다.

“당신의 난입은 성공입니다. 그 대단한 집념을 제가 기뻐해야 할지 말지 고민입니다. 뭐, 그래도 우리가 당장 죽는 건 모면했군요. 아광속에 진입하기 직전에 제가 방향을 잘 틀었거든요. 우주선이 반파되면서 말이죠.”

카슈라가 수리 드론 세 대를 움직여서 통제실을 고치고 있었다. 수리 드론들은 엉망이 된 통제실부터 고쳐나가며 기능을 하나씩 복원했다.

“나이거 행성계 바깥에는 뭐가 있는 거지? 제국의 정찰기도 그렇고, 너도 외곽으로 나가길 두려워하더군. 11번째 행성인 베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말이야.”

카슈라의 안광 하나가 내게로 향했다.

나도 내가 뻔뻔하게 구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뇌를 자신과 연결하려는 사이코 앞에서 양심이나 체면을 지킬 필요는 없을 터다.

“‘확정된 죽음’이죠. 그 이상은 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행동 원리에 감정이 아예 배제되는 건 아니거든요.”

“하하, 조금 안심이 되는군. 너도 사람이긴 하네. 안 그래도 네 비인간적인 친절함에 질린 참이야.”

카슈라는 최소의 수리가 끝나자마자 기계식 조작계를 전부 바닥에 집어넣었다. 그는 내가 끼어들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디지털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위이이잉.

홀로그램이 드디어 통제실 중앙에 떠올랐다. 나이거 행성계의 지도부터 나왔다.

“……좋지 않군요. 완전히 표류했습니다. 여긴 무인 구역입니다. 그 어떤 상단도 우주선도 다니지 않는 곳이죠. 여기선 구조 전파도 닿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네 전설도 여기서 마감이로군.”

“당신의 삶도요. 의료설비가 멀쩡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뇌를 꺼내서 저와 연결했을 겁니다. 그럼 다른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카슈라는 자신의 감정을 미미하게 표출했다. 놈에게 이 정도까지 감정을 끌어낸 것 만해도 내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와 카슈라는 표류하는 우주선에서 공간을 공유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카슈라는 우주선 복구에 열중이었으나 쉽지 않은 듯했다. 우주 유영이 가능한 드론이 매일매일 우주선을 손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보다 당신이 먼저 죽겠군요. 살아서 제 파멸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카슈라가 내 입에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나는 물을 마시면서 웃었다.

“저승에서 구경해도 돼. 식수나 아끼지 그래? 정화장치가 있어도 한계가 있을 텐데?”

“당신의 뇌는 제게 중요하니까요.”

“우습군. 이 와중에도 뇌 타령이라니.”

난 허탈하게 웃었다.

물을 마시더라도, 나는 굶주리며 메말라가고 있었다. 우주선의 창고 외벽이 부서져서 식량이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카슈라는 동면에 가까운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하루에 두어 시간만 깨어났다가 금세 다시 잠들곤 했다.

나도 카슈라의 우주선 구조가 점차 눈에 익었다. 홀로그램으로 살핀 우주선 내부에선 몇몇 시설이 작동하고 있었다.

‘저쪽 구역으론 전력이 끊이지 않게 공급하고 있어. 예비 축전지도 저 구역의 전력 공급을 1순위로 설정해놨고.’

나는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아끼려고 평소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도 오랫동안 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대론 한 달은커녕 보름도 버티지 못할 거다.’

내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회복을 위해선 풍부한 영양소와 단백질이 있어야 했다.

위이잉.

정해진 시간이 되자, 깨어난 카슈라의 안광이 빛났다. 그는 내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어쩔 수 없군요. 당신도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카슈라는 드론을 통제실 바깥으로 보냈다.

나는 곧 카슈라가 마지막까지 전력을 공급하던 시설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금방 나올 답이었으나, 이 정도의 사고력도 발휘하지 못할 만큼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전력이 가던 곳은 뇌 보관실.’

예비 뇌를 보존하는 장소가 우주선 내부에 있을 것이다. 카슈라는 필요에 따라 뇌를 일부 교체하는 괴물이니까.

나는 흐릿한 시야로 카슈라의 드론을 응시했다. 드론은 뭔가를 들고 있었다.

내 의식이 깜빡거렸고,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꿈을 꾸듯 모든 게 몽롱하다.

치이이익.

무언가 굽는 소리가 났다.

“드시지요. 영양가는 제법 있을 겁니다.”

카슈라의 보조 팔이 움직이더니 내 입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숟가락에 담긴 건 ‘고기’였다.

난 본능적으로 고기를 씹어서 삼켰다. 그리고……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우, 읍!”

내가 음식을 게워내기 전에 카슈라가 내 입을 막아서 삼키길 유도했다.

‘이 미치광이가…….’

내게 인육을 먹였다. 그것도 인간의 뇌였다.

카슈라는 예비용 뇌를 꺼내서 반으로 잘라 구웠다. 절반 남은 뇌가 유리 용기 안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식인은 의외로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선 제한적으로 허가하기도 했죠. 삼키셔야 합니다, 루카.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나는 눈을 부라리다가 반쯤 게워낸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제야 카슈라가 내 입에서 손을 뗐다.

“넌…… 도대체…… 바닥이 어디까지인 거지?”

“조난 상황에서 중요도가 낮은 신체부터 절단해 먹고 생존한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죠.”

“이건 뇌잖아. 사람의…….”

“제 ‘일부’입니다. 중요성이 낮은 부위죠. 당신보다 가치가 낮습니다.”

나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난 도저히 무쉬르 알 카슈라의 도덕관과 가치관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짧은 인생에서…… 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외계종족도 있었고, 터무니없는 악인과 괴인도 있었다.

그러나 무쉬르 알 카슈라는 독보적이었다.

차라리 제국의 타락한 귀족처럼 영혼이 무너지고 정신이 파괴된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인육을 탐하고 온갖 변태적인 쾌락을 누리는 건 혐오스럽지만 이해의 영역에 있었다.

‘이 와중에도 느껴지는 건…… 무쉬르 알 카슈라의 정신은 멀쩡하다는 것이다.’

이 괴물은 내 관점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키누안과는 전혀 다른 미지였다.

‘내게 인육을 먹였기에 역한 게 아니다.’

식인 정돈 나도 각오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어려울 것도 없지.

그러나 카슈라는 자신과 연결되었던 뇌, 자신의 의식이 담긴 뇌를 내게 먹였다.

형용하기 힘든 생리적 거부감이 치밀었다.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직 내 뇌를 포기하지 않았군.”

“당신도 굶어 죽을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전 최대한 완벽한 상태로 당신의 뇌를 사용하고 싶지만…… 최악의 상황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 반응이 약해지면, 즉시 뇌를 꺼내서 용기에 넣을 겁니다. 손상이 있더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큭, 큭큭큭.”

난 눈을 질끈 감고 웃었다. 웃겨서 웃은 게 아니다. 나도 내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혐오와 증오를 넘어선 무언가가 보일 것 같았다. 내 뇌를 이렇게까지 원한다고? 가져가라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난…… 어떤 의미로 널 존경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니 나와 내기를 하자, 카슈라.”

나는 눈을 뜨며 말했다. 카슈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기 말씀이십니까? 우리의 지루한 표류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군요.”

“네가 우주선을 수리하고 있다는 건 알아. 언젠가 수리가 끝나긴 하겠지.”

“그렇겠죠.”

“그리고, 제국이든 뭐든 간에 사람들이 우릴 찾아 나이거 행성계를 뒤적거리고 있을 거야.”

“그것도 그렇겠죠. 그래서요?”

“네 우주선 수리와 합일에 필요한 준비가 끝나면…… 난 협조하겠다. 합일 과정이 뭔지 몰라도 내가 의식적으로 순응하면 더 쉬워지지 않겠어? 너도 알다시피, 난 자존심 빼면 시체인 놈이라 약속은 꽤 잘 지키는 편이지.”

카슈라의 안광이 커졌다.

“흠, 제 승리 조건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승리 조건은 무엇입니까?”

“이번 기회에서도 방해받아 날 놓치면 내 뇌는 이만 포기해라. 끈덕지게 집착하지 마.”

“한없이 끈질긴 게…… 제 장점이죠.”

“그러니까 깔끔하게 날 포기하라는 조건을 넣는 거다. 평생 네게 쫓기며 살긴 싫으니까. 당분간 네 뇌를 구워 먹으면서 버틸 텐데, 이 정도 조건을 달아야 하지 않겠어?”

카슈라는 잠시 침묵했다. 뇌끼리 소통하듯 안광이 번갈아 빛났다.

“……저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당신도 약속을 지키겠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카슈라가 내 제안에 넘어오고 있었다.

“내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렇긴 하죠. 그렇다면 내기는 성립됐습니다, 루카. 패배한 쪽이 순응하기로 하죠.”

지금까지 에너지를 아끼던 카슈라가 일어섰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게 신호라는 듯이 조명이 최대치로 밝아지면서 통제실의 모니터에 전력이 들어오고 있었다.

……섬뜩하다, 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루카, 당신의 말대로입니다. 전 당신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잘 알고 있죠.”

카슈라는 통제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각종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그를 둘러쌌다. 노랗고 붉던 우주선의 상태가 초록빛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날 속였군.”

우주선의 수리는 진작 끝나있었다.

“이젠 거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유대는 깊어졌고, 당신은 심리적으로 제게 밀려 패배를 완벽히 수긍했습니다. 이로써 합일의 조건이 갖춰줬군요.”

놈의 말대로였다. 속아서 화나기는커녕, 패배를 납득하는 심정이 더 컸다.

우우우웅.

엔진음이 퍼지고 있었다.

“우주선 내부의 의료시설이 망가진 건 사실입니다만, 나이거 행성계 곳곳에 제가 마련해둔 은신처들이 있죠. 거기까지 도착하면 제 ‘승리’입니다.”

카슈라는 웃고 있었다. 놈이 소리 내지 않아도 나는 놈의 웃음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겐 유대가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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