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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라, 루카. 기억의 불완전성을.
우린 기억에 의존해 살아간다. 기억이란 자아와 의식을 구성하는 밑바탕이다. 그리고 우린 자신의 기억이 진실이고 현실이라 믿는다.
기억의 흔들림은 자아와 의식의 흔들림이지.
그러나 현명한 자라면, 자의식과 기억을 의심해야 하는 법이다.
기억이란 현실도 아니고, 현실을 비추는 거울조차 아니다. 현실의 불완전한 잔상일 뿐. 그마저도 지극히 주관적인 왜곡으로 그득한 불완전한 그림. 그게 기억의 실체다.
우린 이토록 불완전한 기억을 토대로 자아를 형성하고, 나란 존재를 만들어 간다.
……모호할수록 현재에 집중해라.
루카, 너는 지금 어떤 상황에 빠져있지? 너의 현재는 어떠하지?
깜빡.
나는 눈을 떴다. 먼지와 흙이 입에 닿았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눈은 따끔하고, 목은 꺼끌꺼끌했다.
‘열기와 불꽃.’
공기가 뜨겁고 열상이 쓰라리다.
방금, 사고나 폭발이 있었다. 그 여파에 휘말린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기억이 혼미하다. 일부가 증발한 것 같다. 내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흐릿했다. 난 필사적으로 부서진 기억의 파편을 끌어모았다.
관자놀이가 뜨끈했다. 매만지니 핏물이 손바닥에 잔뜩 배어 나왔다. 그래, 난 머리에 부상을 당한 모양이다.
‘현재에 집중해. 사물을 보고 일어나는 현상으로 과거를 유추해라.’
내가 대응하지 못하고 기절할 정도면,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거다.
끼릭.
나는 반사적으로 무기가 있는 위치를 더듬었다.
‘크루시스, 루이나, 불나방.’
화광자검은 회수를 못 했다. 중갑의 괴물을 상대로는 유용한 무기인데 말이지.
‘……중갑의 괴물?’
누굴 말하는 거지?
나는 무릎을 잡으며 간신히 일어났다. 삐걱거리는 의족과 의수는 훌륭하게 움직인다. 이런 위기 상황이 있을 때마다 난 라피스 라줄리에게 감사한다.
내 의체 제작자인 라피스 라줄리는 똑똑히 기억난다. 증발한 기억은 단기니까.
‘중갑의 괴물.’
중갑, 전갑의체, 레기온, 아, 빌어먹을, 무쉬르 알 카슈라.
그래, 난 무쉬르 알 카슈라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쩌다가? 난 위험을 무릅쓰며 키누안을 보더시티 바깥으로 유인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놈이 안배해둔 카슈라와 마주했다.
증발하는 기억을 붙잡아서 돌려놓자. 그러나 순차적으로 되새기면 늦는다.
‘지금은 위기 상황이야. 가장 최근부터 상기해. 느긋하게 되새김질할 여유는 없어.’
나는 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빠드득 깨물었다. 통각이 차갑게 정수리로 치솟았다. 냉수를 끼얹듯 각성감이 올라왔다.
‘일레이!’
일레이가 날 구하러 왔었다. 고성능 공중 이륜차를 꼴사납게 자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일레이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시야가 그제야 넓어졌다.
난 주변을 보았다. 공중 이륜차의 외장과 부품이 찌그러지고 부서진 채로 흩어져 있었고, 일레이가 자랑하던 반중력 엔진은 반파된 채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린 당한 거로군.’
도주는 실패했다.
‘격추당했다. 아마도, 무쉬르 알 카슈라에게.’
시험기 MAU와 그림자 레기온도 카슈라를 막지 못했다. 놈은 상식을 벗어난 전투력으로 내가 만든 혼란을 힘으로 돌파했다.
‘강대한 힘 앞에선 얄팍한 계략은 무용하군.’
나도 절실히 깨달았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한계도 말이다.
카슈라는 현세대 인류가 전사로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의 한 형태일 것이다. 비록 온갖 편법으로 도배했을지언정 그 힘만큼은 맹렬한 현실이다.
나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잔해와 뒤엉킨 일레이를 발견했다.
“일레이, 움직일 수 있냐?”
내 말에 일레이가 반응했다.
일레이의 동공에서 초점이 돌아왔다. 그도 막 의식을 차린 듯했다.
일레이의 동공 테두리가 빛났다. 그는 의안의 가상 인터페이스로 자신의 상태를 훑어보고 있었다.
“척수가 끊어졌어. 미안하지만, 혼자 도망쳐라.”
“잘난 척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등신아.”
나는 잔해를 들어서 치우곤 일레이를 뒤집었다.
‘엉망이군.’
일레이의 등에는 인공척수가 부러진 채로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신경계와 구동부의 각종 케이블도 끊어지고 얽힌 채로 삐져나온 상태였다.
“야, 루카. 헛짓하지 말고, 도망치라니까. 놈의 목표는 어차피 너야. 나는 괜찮…….”
“혀 깨물기 전에 이 악물어. 구시대적인 요법을 써보자고.”
나는 손발로 일레이의 상체와 허리를 누르며 튀어나온 척수를 그대로 밀어 넣었다. 드러난 회로는 섬뜩하게 반짝이고 전류가 튀었다.
“커억, 끅, 야, 이, 미친 새끼야, 신경계 통각이, 말은 하고 해야…….”
일레이가 온몸을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녀석이 저렇게 아파하는 꼴을 보니 꽤 즐겁고 재밌다.
“위치만 바르게 잡으면 불량하게나마 연결이 돌아오는 곳도 있을 거야. 집중하고 감각을 곤두세워서 신체를 움직이려고 해봐. 신호가 통하는 부분끼리 묶을 테니까.”
나는 우격다짐으로 응급조치를 했다. 어떻게든 물리적으로 닿으면 접점이 생기면서 회복하는 구동계와 신경계가 있을 터다. 무식해 보여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심지어 교본에도 나오는 방법이다.
꿈틀.
일레이의 발과 다리가 미약하게나마 움직였다.
나는 크루시스의 자루 밑부분을 망치로 사용하며 일레이의 척수를 이리저리 두드리며 성형했다. 그때마다 일레이의 신음이 끔찍했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난 적당히 척수와 주변부를 찌그러뜨린 다음에, 억지로 맞물려 끼워 맞췄다.
합선된 듯이 전류가 크게 일면서 일레이의 다리가 꿈틀거렸다.
“젠장, 어이가 없어서 미치겠네. 이게 왜 움직이는 거야?”
일레이는 불완전하게 비틀거리면서도 일어섰다.
“제국의 위대한 기술력과 믿음의 힘이지. 우린 카슈라에게 저격을 당한 건가?”
내가 질문했다.
일레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내 이마의 부상을 발견했다. 녀석도 정신이 어지간히 없었던 모양이다.
“루카, 너, 머리에…….”
일레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젠장.
“자세히 말하지 마. 당장 조치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아. 일단 난 단기기억의 손실이 있다. 네 이륜차를 탄 이후의 기억이 없어.”
일레이도 자신의 무장을 확인했다. 그는 허리춤의 수납 가방을 뒤적거려 투과창이 달린 탄창을 꺼내더니 권총에 장전했다.
일레이의 권총은 기형적인 총신이 팔뚝처럼 길었다. 저게 녀석의 전용무기다. 원래는 작렬탄을 쓰지만, 지금은 다른 특수탄을 장전한 듯했다.
“루카, 우린 무쉬르 알 카슈라에게 쫓기고 있어. 녀석이 저격으로 우리가 탄 차량을 날렸지. 널 생포하려고 화력 조절하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죽고 없었을 거야.”
나는 이마에서 흐른 피가 뺨과 턱을 타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자칫하면 나도 죽을 뻔했다.
‘그만큼 카슈라도 급히 저격한 거다. 내가 죽을 위험이 있어도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거지.’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렸다. 카슈라가 그림자 레기온과 MAU들을 떨쳐내려고 화력전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데리고 있던 부하들은?”
“다른 이륜차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어. 다들 죽었겠지.”
“네 부하들은 항상 죽는 게 일이네. 예전부터 늘 그랬지.”
난 반쯤은 진담을 담아 농을 던졌다. 예전부터 일레이의 부하들은 죽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내 밑에 배속되는 걸 다들 싫어해.”
일레이는 발끈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진짜냐?”
“생존율이 실제로 낮거든. 소모를 꺼리지 않아서 그렇지.”
“너도 사람이 참 글러 먹었네.”
“너는 인기 많은 대장이 됐을 거야. 부하를 쉽게 버리지 않을 테니까.”
“낯 뜨거운 말은 집어치워. 다음 작전은?”
“없어. 그대로 널 데리고 탈출할 생각만으로 달려왔거든. 내 생각 이상으로 놈은 괴물이네. 불규칙한 궤적으로 움직였는데 정밀하게 엔진만 저격했어.”
“아주 우수한 아키에스 빅티마의 뇌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 정돈 예측했겠지.”
“참 지긋지긋하네. 아키에스 빅티마인지 뭔지.”
“나도 그래.”
웃긴 말이지만, 난 지금 상황이 꽤 즐거웠다. 일레이와 이렇게 너털너털하게 이야기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전장에서 공통의 적을 맞닥뜨린 상황에서 우리는 복잡한 계략과 음모는 집어치우고 웃을 수 있었다.
‘차라리 모든 걸 접어두고, 단순한 군인으로 살아갔다면…….’
내 인생을 꽤 즐겁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인생의 궤적은 이미 크게 휘었다. ‘제국의 충실한 군인 루카’라는 미래는 사라지고 없었다.
“루카, 마지막으로 말할게. 시간을 벌 테니 도망가라.”
“카슈라를 상대로 10초라도 벌겠어?”
“사실, 난 널 제국으로 끌고 가려고 온 거야. 당장 놈에게 붙잡힐 걸 볼 수 없어서 믿으라니 뭐니 지껄인 거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널 이반에게 데려가려고 했어.”
일레이가 입술을 비틀었다. 내게 배신감이라도 심어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말을 한다고 딱히 너한테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아. 넌 옛날부터 거짓말을 자주 했으니까. 내게 일레이 카르티카는 거짓말쟁이거든.”
“하하, 날 그런 인간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카르티카의 여우라는 네 별명이 좋은 의미로 붙었겠어? 입 닥치고, 싸울 준비나 해. 먼지가…… 피어오른다.”
화마와 연기가 흐느적거리다가 치솟으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우리가 왔던 언덕 너머로 먼지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카슈라의 기동음도 들렸다.
“일레이, 비장의 수라도 있어? 아까 갈아 끼운 탄은?”
“대 레기온 전용탄환이야. 우리 가문의 장인이 한 발 한 발 정성스럽게 겹겹이 쌓아 만든 특수 관통탄이지.”
나는 일레이의 손과 다리를 확인했다. 미동이 많고 섬세하지도 못했다.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역시 무리다.’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어도 강적과 싸울 상태는 아니었다. 일레이의 자랑인 기동성과 사격 능력도 살리기 힘들 터다.
대 레기온 탄환 정도로는 화력도 부족하다. 카슈라는 레기온 이상의 존재였다.
‘나 혼자였다면…….’
마지막까지 카슈라와 싸운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기적을 바라면서 말이지.
나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카슈라는 날 생포하려고 하지만, 일레이는 무자비하게 죽여버릴 터다. 카슈라의 화력이라면 어렵지 않겠지.
소년기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한 소녀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비참한 삶을 살았던 릴리안 라모네스였다.
‘루카, 부디…….’
릴리안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다. 일레이를 살려달라고 말이다. 물론, 릴리안은 죽고 없다. 난 귀신이나 유령도 믿지 않는다.
일레이를 살려달라는 릴리안의 목소리는, 사실 내 바람이겠지.
오래전, 일레이는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릴리안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녀석은 자신을 부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날의 사건이 일레이를 완전한 어둠으로 이끌었다.
……난 이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카르티카의 여우, 일레이는 날 배신했을 수도 있고, 내 상상 이상으로 뒤틀린 괴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레이 카르티카는 내 친구이다. 난 일레이의 죽음을 선택할 비위가 없다.
터- 엉!
내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일레이의 정수리를 잡고 턱을 때렸다. 이 정도면 전신의체라도 뇌가 흔들렸을 터다.
일레이의 동공에서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일레이, 내가 잘못되면 지젤을 부탁한다. 살아있으면 무슨 죄를 저질렀건 간에 날 대신해서 보호해줘. 예나 지금이나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네.”
“루…….”
일레이는 용케도 버티며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 정신력인지 아니면 의체의 성능 덕분인지 모르겠다.
퉁!
난 일레이의 관자놀이를 때려서 옆으로 한 번 더 흔들었다.
일레이의 의식이 확실하게 끊어졌다.
툭.
일레이가 내 팔을 잡은 채로 무릎을 꿇었다.
스륵.
난 일레이의 손을 밀어내며 걸어오는 카슈라를 보았다.
쉬이이이이.
증기와 연기를 휘어 감은 카슈라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안광들은 주변을 훑듯 희번덕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끼이익.
카슈라는 그 어떤 설명도 듣지 않고 내 의도를 파악했다.
“좋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루카.”
카슈라는 연인에게 구애하듯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을 내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