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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한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려면 ‘변수’를 창출해야 한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한 치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에서 힘을 발휘한다. 혼란이 깊어질수록 유리하다.
혼돈의 어둠은 짙어지고 있었다.
처음은 나와 키누안으로 시작된 혼돈이었다. 나와 키누안은 수싸움을 벌이며 서로를 예측하려 했다. 상대의 예상을 깨기 위해 가진 패를 과감히 꺼내며 변수를 현실에 투입했다.
‘혼돈의 방향성을 좀 더 유리하게 끌어오기 위해서.’
어지간한 상대라면, 작은 혼돈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서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키누안은 아키에스 빅티마 숙련자다. 서로를 쉽사리 예측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려면 상식 밖의 변수를 끌어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린 도박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6연발 리볼버에 5발을 장전한 다음, 내 관자놀이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격이었다.
이 위험천만한 도박을 수없이 통과해야 우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스스로 만든 혼란과 혼돈에 잡아먹히는 것이 우리 규칙이었다.
내 비장의 수는 제국이었다.
나는 제국을 이 혼돈의 중심으로 끌어왔다.
‘이반은 날 손에 넣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난 현재 보더시티 바깥에 있고, 상황은 혼란하다. 날 데려가기 좋은 시기였다.
황제의 그림자 레기온, 연방의 시범기 MAU, 무쉬르 알 카슈라, 그리고 나, 루카.
목적이 다른 강대한 집단이 한 장소에 모였다.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난 정답을 찾아야 한다.
기이잉.
무쉬르 알 카슈라는 상공을 응시했다. 맑은 하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괴물.’
통상적으로 아키에스 빅티마는 전갑의체와 호환되지 않는다. 전갑의체는 뇌의 자원과 연산을 막대하게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쉬르 알 카슈라는 뇌를 여럿 사용하면서 약점을 타파했다. 전갑의체의 전투력도 가지고 아키에스 빅티마도 사용했다.
‘……바바라가 타인의 신체를 쉽게 옮겨 타는 것처럼, 여러 뇌를 통합해서 통제하는 건 카슈라만의 능력이다.’
훈련이나 생체 개조로 카슈라 같은 군인을 양성할 수 있었다면, 제국도 이미 하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특질에 가까운 능력일 터다.
카슈라는 제국의 레기온이 온다는 소리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이스마엘의 MAU들도 멀찍이서 대치 상황을 유지했다.
‘영악하군,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이대로 카슈라와 정면충돌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카슈라의 전투력이 저번과 다르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연방의 고위 관료니 카슈라의 전투 기록을 본 적도 있을 터다.
‘여기서 시범기 MAU를 소득 없이 다 잃는다면, 이스마엘의 경력도 끝장이다. 신중할 수밖에 없어.’
상공에서 굉음과 함께 시커먼 점이 멈췄다. 제국의 고속 수송기였다.
곧 레기온이 떨어질 것이다. 이반은 가장 빨리 투입할 수 있는 제국의 전력을 여기에 투사할 터다.
“루카, 이번 전투에서 당신이 더는 뇌를 소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신의 귀한 뇌를 효율적으로 오래 쓰고 싶으니까요.”
“기다려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곤란하지.”
나는 크루시스와 루이나를 교차하며 내렸다.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됐다.
‘최악의 경우, 나는…….’
저 괴물의 부품으로 수십 년을 살아갈 생각은 없다. 난 내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길 각오를 했다.
“흠, 그렇게 대답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여차하면 자살할 생각이시겠죠.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니까요. 그러니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은 지젤 쿠스토리아 양을 찾고 있는 거죠?”
내 눈썹이 꿈틀거렸을 터다. 지금은 감정 통제가 힘들었다.
‘저 다음 말을 들으면 안 돼.’
하지만 당장 내가 놈의 말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게 바로 약자의 처지인 거다.
“제가 지젤 쿠스토리아 양을 찾아드리겠습니다.”
“하, 행성을 호령하는 위정자와 수십, 수백만의 생명을 다루는 정보원들조차 모르는걸?”
내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조롱했다. 그러나 무쉬르 알 카슈라에겐 방도가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법이 있죠, 후, 후, 후. 자, 이제 무대의 주인공들이 전부 모였군요.”
카슈라는 기계적인 웃음을 흘리더니 발에 달린 바퀴를 가속하며 뒤로 물러났다.
콰- 앙!
카슈라가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격이었다.
쉬이이이이!
하늘에서 시커먼 레기온 다섯 기가 강하하고 있었다. 황제 직속의 그림자 레기온이었다. 그들은 허리와 무릎을 구부리며 착지했다.
쿠우웅! 쿵!
레기온들의 시커먼 망토가 흐느끼듯 펄럭였다. 그들은 붉은 렌즈로 나와 카슈라를 번갈아 보았다.
레기온들은 나와 카슈라 사이에 서서 날 보호하듯 자리를 잡았다.
휙.
레기온 하나가 내게 통신기를 던졌다. 나는 통신기를 귀에 부착했다.
치직, 치직.
제국의 최고 보안 회선이 열렸다. 통신기의 외부 회로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감청을 피하려고 매초마다 회선을 수천 번 바꾸고 있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네, 루카. 내 도움이 필요할 정도였어?
회선이 실시간으로 바뀌면서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잡음조차 이반의 미성을 지우진 못했다.
“당신이 절 믿지 못하고 멋대로 그림자들을 보내신 거죠.”
-하하, 말장난은 그만두자고. 내가 사람을 보낼 줄 알고 보더시티에 나온 거잖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널 데려갈 명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그토록 찾으시던 키누안이 중상을 입은 채로 이 근처에 있습니다.”
-알아. 이미 그쪽으론 다른 팀을 보냈어.
나는 움찔했다. 제국의 병력이 에퀘시안 용병과 충돌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놈을 잡으면 자유를 약속하셨죠.”
-글쎄, 여기서 잡는다면 내가 잡은 거지. 네가 잡은 건 아니잖아.
이럴 줄 알았다. 애초에 내가 자력으로 키누안을 바치더라도 자유를 줄 사람이 아니다. 이반이 믿을 수 있는 상대였다면, 나는 진작 제국에 돌아갔을 터다.
“제가 끌어낸 거죠, 폐하.”
내가 의미 없이 투덜거렸다.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지만, 상대가 무쉬르 알 카슈라로군. 노바스의 골칫덩이 중 하나지…….
이반의 다음 말은 내가 아닌 그림자들에게 보내는 전언이었다.
-……충실하고도 거룩한 수호자들이여. 이 모든 혼돈을 잠재우고, 질서의 이름으로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를 내 앞에 데려와라. 방해꾼은 모두 제거하도록.
덩치가 가장 큰 그림자 레기온 한 기가 내 앞에 굳건하게 서며 방패를 들었다.
-여, 기서부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개인의 폭력은 무용한, 지점이지.
나는 차마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었다. 이다음은 내 통제에서 벗어난 혼돈이다.
……내가 만든 혼돈이 내 손아귀를 벗어나고 말았다.
나로 인해 촉발된 ‘전쟁’이 시작됐다. 레기온과 MAU는 둘 다 국가의 전쟁병기였다.
소리를 하나하나 언급하며 묘사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굉음이 일었다. 생체 눈으론 피아식별조차 힘들 정도로 화려한 폭발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림자 레기온과 시험기 MAU는 암묵적 동맹을 맺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쉬르 알 카슈라가 우선순위라는 걸 알았다.
에너지 투사체와 고폭탄이 오가며 대지를 깨부수고 대기를 집어삼켰다. 대지가 시커먼 폐허로 변하고 있었다.
‘국가의 폭력.’
그 키누안조차 결국은 개인이었다. 그는 제국을 뒤흔들 한순간을 위해 수십 년을 기다렸다.
국가의 폭력은 절대적이다. 개인의 힘은 국가의 폭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게 국가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다.
‘일인군단, 무쉬르 알 카슈라.’
이반이 왜 카슈라를 골칫덩이라고 칭했는지 알겠다.
‘카슈라는 국가 입장에서 있어선 안 될 존재다.’
개인이 국가의 폭력을 버텨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은 아니긴 하다. 무쉬르 알 카슈라는 하나의 집단이니까.
‘국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군대.’
그게 카슈라였다. 물론 나에게 당할 정도로 평소에는 여러 제약이 있으나, 카슈라의 최고점 전투력은 국가도 경계할 힘이었다.
카슈라의 전갑의체에서 분리된 드론이 하늘을 떠다녔다. 드론은 각자 의지를 가진 듯이 전장을 누비며 공격을 방어했다.
MAU의 전자계통 미사일은 드론에게 해킹당한 듯이 추락하거나 역으로 추진체가 작동했다. 일부는 레기온에게 떨어지기도 했다.
‘우수한 해커의 뇌가 금속 상자에 있는 거다.’
카슈라의 위치 선정과 움직임은 아키에스 빅티마 특유의 최적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이해 못 할 위치 선정이지만…… 내가 보기엔 저게 정답이었다.
카슈라는 레기온보다 조금 더 큰 육중한 덩치로도 교묘하게 공격을 빠져나갔다. 레기온 중 일부는 창칼을 빼 들고 근접전을 시도했다.
키잉, 킹!
카슈라의 보조 팔 두 개가 칼 두 자루를 뽑아 레기온과 근접 전투를 벌였다. 그러면서도 카슈라의 다른 팔은 총기를 들고 원거리 전투를 수행했다.
키이이이잉!
카슈라의 단분자 칼날이 레기온 한 기의 허리를 갈랐다.
촤르르륵!
카슈라는 단분자 코팅이 벗겨진 칼을 허벅지에 수납했다. 5초가 지나자 칼날이 다시 튀어나왔다.
‘단분자 코팅을 즉석에서 했다.’
놈은 전장에서 단분자 코팅을 칼날에 바로 입혔다. 간이 코팅인지라 위력은 아까보다 떨어진 듯했으나, 어쨌든 내구성이 약한 단분자 코팅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투- 캉! 퉁!
카슈라는 어깨의 저격포를 연달아 두 번 쐈다. 연속 포격이었으나 포탄의 궤적이 전혀 달랐다.
원을 그리며 고속기동하던 MAU의 조종석에 구멍이 났다. 저 MAU도 첫발은 피했으나 두 번째 탄이 회피 지점을 예측해 가로지른 것이다.
파일럿이 당한 MAU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굴렀다.
……이즈음해서 나는 깨달았다.
‘내 도박은 실패했다.’
키누안도 놓쳤다. 내가 끌어온 세력은 카슈라에게 대파당하고 있었다.
카슈라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협공을 버티는 수준이 아니라 역공을 퍼붓고 있었다.
‘기껏해야 제국에 잡혀가거나 키누안에게 패배해 죽거나 생포당하는 것이 최악의 결말이라고 생각했지.’
카슈라에게 잡히는 결과는 내 상정에 없었다.
세상은 예측불허한 상황과 결과의 연속이다. 오늘도 배웠구나, 루카.
끼릭.
루이나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지젤.’
카슈라는 지젤을 찾아주겠다 말했다. 그 말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치직.
제국의 통신기에 잡음이 일었다.
-루카! 12초 뒤에 도착한다. 도망칠 준비를 해.
통신기에서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웅!
날 여태 지키던 레기온이 카슈라의 시야를 막듯이 달려 나갔다.
키이이이이잇!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뒤편에서 울렸다. 공중 이륜차를 탄 일레이와 그 부하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일레이 카르티카.’
일레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부하 다섯 명도 함께였다.
‘이반의 명령을 받고 오는 거냐? 일레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아마도 키누안 탐색을 하던 팀이 일레이였을 거야.’
이반이 말한 키누안을 찾는 다른 팀이었다.
‘그럼 이반이 탐색 명령을 철회하고 날 우선하라고 한 건가?’
아무리 일레이라도 대놓고 나를 빼돌리진 못할 터다. 곁에는 부하도 다섯 명이나 있었다.
-지금은 날 믿어, 루카.
일레이는 내 갈등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젠장, 어차피 다른 방도도 없다.
일레이가 팔을 옆으로 뻗으며 내 쪽으로 질주했다.
카슈라도 내 이쪽을 보더니 사격을 일레이 부대에게 퍼부었다.
레기온들이 자신의 몸을 방패로 쓰며 카슈라의 공격을 막아내며 추가 사격을 저지했다.
키이이이잉!
대지를 훑던 일레이의 공중 이륜차가 내 옆을 지나가려 했다.
나도 눈을 감았다가 뜨며 손을 뻗었다.
타악!
일레이의 의수가 내 손을 굳게 잡아끌었다.
키리리리릿!
내가 올라타자마자, 일레이는 잽싸게 공중 이륜차를 비틀어 궤도를 바꿨다. 차량의 밑부분이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기이잉!
그러나 공중 이륜차는 놀라운 회선력으로 방향을 바꾸며 낮게 부양했다. 가속이 거의 죽지 않았고, 묘하게 밑부분이 꿀렁거렸다.
“코라산 반중력 엔진을 단 놈이야. 끝내주지?”
“자랑은 나중에 하고 일단 달려! 놈이 온다.”
나는 공중 이륜차 뒷좌석에 거꾸로 타고선 루이나를 겨누었다.
끼이이익! 끼릭!
무쉬르 알 카슈라는 덤벼드는 그림자 레기온을 쳐내고 베어내고 있었다. 놈은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 MAU를 무시하며 이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