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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68

268
사람의 감정은 단색이 아니다. 특히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라면 더욱더 다양한 색을 띠고 있다.

우린 감정의 주색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는 것뿐이다.

따스한 빛깔의 붉은색, 주황빛 따위라면 사랑. 거칠고 사납게 붉다면 분노, 끈적하게 어둡다면 증오, 투명할 정도로 파랗다면 무관심, 들끓는 황금빛이라면 열망…….

저마다의 인지적 색상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여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터다.

나, 루카는 키누안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주색조차 선명하지 않다.

의심, 미지, 애착, 증오, 기대, 분노…….

여러 물감을 물에 쏟아 넣고 휘저은 듯이 혼란하다. 뒤섞인 감정의 색깔은 대체로 검다. 얼핏 보면 시커먼 증오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명한 검은색은 아니다. 안개처럼 흐릿하고 탁한 검정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형형색색의 빛줄기가 실핏줄처럼 엇갈려 있다.

‘엿 같은 새끼.’

이 심란한 감정도 놈이 내게 심어둔 것이다. 가시넝쿨이 날 죄는 것 같다.

끼이익.

나는 충격권총 루이나를 들어서 멀리 있는 키누안에게 겨누었다.

‘루이나 프로바티오.’

이름은 늘어났으나 기능과 위력은 차이가 없었다. 쌍둥이처럼 같은 무기였다.

우우웅!

충격탄의 에너지 활동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투- 카앙!

방아쇠를 당기니 경쾌한 총성이 질주한다.

뭐, 당연히 맞을 리는 없다.

키누안은 바위 뒤로 훌쩍 뛰어서 탄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그가 있던 자리에 충격탄 특유의 폭발이 푸르스름하게 일었다.

‘무수한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놈이 이륜차를 권총 하나로 반파한 건 초인적인 전투 사고와 연산의 결과물이라고 치자. 이건 백번 양보해보면 아키에스 빅티마로 가능한 영역이다. 어마어마한 통찰력을 발휘하면 된다.

그러나 키누안은 어떻게 나보다 앞서서 왔는가? 무작위나 다름없는 이륜차의 이동 경로를 어떻게 읽어낸 거지?

‘아키에스 빅티마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초능력이 아니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결과물은 어디까지나 물리 현상과 합리적 사고의 결과다.

‘내 이동 경로를 예상하는 건 불가능해. 날 뒤에서 쫓아와야 한다. 나보다 앞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건 완벽한 무작위였다.

‘키누안은 어떻게 나보다 앞서서 대기한 거지?’

생각해라, 루카. 이 의문을 풀어내지 못하면 당하는 건 나다.

끼릭!

난 연달아 충격탄을 발사하며 전진했다. 제압 사격이 일 때마다 키누안이 숨어있는 바위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파편이 사방팔방 튀었다.

팅! 치이이!

냉매 탄피가 열을 머금은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키잉!

나는 왼손으로 화광자검을 뽑았다.

‘가능하다면 팔다리를 잘라서 제압한다.’

가장 좋은 건 생포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사살도 각오했다. 놓치는 것보단 죽이는 게 낫다.

‘키누안만 여기서 죽는다면…… 나는 남은 십 년 동안 잠적하면 된다.’

키누안만 없다면, 제국이든 뭐든 상관이 없다. 숨어 다닐 자신이 있었다. 위정자들의 말대로라면 곧 노바스 행성엔 혼란이 닥칠 터니, 내게 신경 쓰지 못하겠지.

끼릭! 터- 엉!

루이나의 탄창이 비었다. 나는 재빨리 교체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했다.

‘압박하고 있는 건 나다. 내 안의 키누안에게 짓눌려서 머뭇거리지 마. 지금 몰아쳐야 해.’

난 펄쩍펄쩍 뛰어서 거리를 좁혔다. 뜀박질마다 수십 미터씩 가까워졌다.

어느덧, 충격탄에 깎인 바위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키누안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괜한 대화로 심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깨어나라, 망할 뇌야. 혹사하는 건 미안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터트릴 때다.’

머릿속에서 도화선이 타오르듯 살벌한 소리가 났다. 신경계와 혈관은 과부하에 시달렸고, 뇌압도 높아지면서 이명이 들렸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지금 이 순간만 버텨.’

나는 바위 위로 뛰어오를 준비를 했다. 총격과 칼부림을 동시에 벌일 계획이었다.

“루카, 잠시만 나와 이야기를…….”

듣지 마라. 놈의 교묘한 화술에 휘말릴 터다.

나는 터질 듯한 기분으로 바위로 올라서려고 했다. 놈이 바위 뒤편에 있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청각 시야로도 확인했다. 말소리도 들렸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키누안은 바위 너머에 있다.

‘마주하는 즉시 충격탄으로 모든 방향을 봉쇄한다. 폭발하는 찰나면 싸울 시간은 충분해.’

화광자검도 투척한다. 불나방은 비장의 수로 남겨두자. 자동추적 권총은 이런 상황에선 장난감이지.

‘화광자검을 던져서 앞을 막아서고, 크루시스를 뽑는다.’

둘로 나뉜 내 사고가 경합하며 계획을 보완하고 수립했다.

내가 가진 모든 화력과 전투 기술을 동원할 생각이다. 내 평생 쌓아온 기량을 여기서 터트려야 했다.

결코, 방심하지 마라.

키누안은 권총 하나로 내 이륜차를 봉쇄했다. 놈도 아키에스 빅티마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일 터다.

우린 마주하기도 전부터 수싸움을 하고 있었다.

바위로 올라서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몇 번이나 돌아갔는지 세기도 힘들었다.

끼이익, 치직, 뚜둑.

머릿속과 귓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콧잔등이 욱신거렸다. 누가 바늘로 내 머리를 쿡쿡 찌르듯 아프다.

사고를 멈추고 싶다. 머리를 혹사하니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핏물이 이목구비가 새어 나오고 있을 터다.

칙!

잡음으로 가득 찬 화면이 일시적으로 또렷해진 기분이었다.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의문이 내 뇌리를 채웠다.

‘키누안은, 어떻게, 나를 앞섰는가?’

이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면, 패배하는 건 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얼마 없다. 비대한 사고로 물리 시간을 잡아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난 물리 법칙에 속한 존재니까.

세상은 멈춘 듯이 느릴 뿐, 멈춘 건 아니다.

핏!

핏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새빨간 커튼이 드리운 것처럼 내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주마등이라는 말이 있다. 죽기 전에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난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내 삶과 경험에서 흔적과 단서를 찾아야 한다.’

아무리 뒤적거려도 없다면 난 여기서 패배하겠지.

휘이이…….

뛰어오른 나는 바위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바위 아래를 보지 않았다.

‘나는…….’

제국, 아크바란, 생도, 테러리스트, 릭, 카이저…….

장면마다 뇌리의 사고가 번쩍번쩍 튄다.

나는 뛰어오르면서 계획을 수정했다. 마지막 순간, 발목을 비틀어 뒤를 보았다.

내 등 뒤의 공간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 하, 이 영악한 양반아.’

키누안은 날 놓칠 수 없었기에 먼저 무기를 드러냈다. 작은 단서였지만 난 그걸 알아낼 수 있었다.

키누안에게 배운 명제가 있다. 그는 아키에스 빅티마에 관해선 거짓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키에스 빅티마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기적이 아니다.’

키누안은 기적을 일으키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영역에 있다.

전지전능하지 않은 존재가 ‘무작위 경로’로 이동한 나보다 어떻게 먼저 자리를 잡은 걸까?

답은 초월적인 기동력이다. 그러나 비행체도 없었고, 나와 같은 고기동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초능력.’

그러니 생각해야 하는 건, 아케인 유물이나 포스 능력.

내가 본 기동형 포스 능력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건 키누안과 연관이 있었다.

‘릭 카이저의 순간이동.’

키누안의 친우이자, 네메시스의 핵심 간부였던 릭 카이저. 그는 구슬 형태의 아케인 유물을 이용해 순간이동을 비장의 수로 사용했다.

키누안이 아직도 순간이동 유물을 가지고 있을까? 가지고 있더라도 사용할 순 있는가? 그걸 능숙하게 쓸 수 있을까? 날 따라잡기 위해 수차례 사용하고도 또 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가능하겠지.’

키누안은 괴물이니까.

……그러나 신은 아니다.

괴물은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결론을 내린 나는 뒤를 보며 화광자검을 휘두른 것이다.

우우웅!

공간이 일렁인다. 청백의 입자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벤다.’

뒤돌아보며 휘두른 화광자검은 입자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래, 날 지배하는 키누안의 그림자를 떨쳐낼 때가 됐다. 놈을 신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리자.

제자는 언젠가 스승을 넘어야 하는 법. 그게 세상의 순리지.

우웅!

청백색 입자가 물리적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키누안의 얼굴과 모습이 테두리부터 드러났다.

치이이익!

이미 화광자검은 키누안의 허리에 박혀있었다.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할 일격이다.

‘난 당신을 예측했다.’

앞서간 건 오늘이 처음일 터다. 그리고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벅찬 짓이다. 두 번이나 이런 짓을 하기 싫었다.

뿌득!

나는 칼을 완전히 휘둘렀다.

촤아아아아!

화광자검이 키누안의 허리를 자르며 지나갔다. 열상의 흔적이 지글거렸다.

상반신만 남은 키누안이 옆으로 날아가듯 튕겨 나갔다. 아케인 유물 사용의 흔적으로 그의 동공과 몸은 푸르스름한 입자를 흘리고 있었다.

쿠웅!

내 등은 바위에 부딪혔고 몸이 흔들렸다. 나는 옆으로 튕겨 나간 키누안을 향해 루이나를 겨누었다.

‘계속 공격해. 망설이지 마라. 놈을 여기서 죽여!’

제압이란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제압하려고 손속을 느슨하게 했다가 내가 당하거나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일이지!

위잉!

날아가던 키누안의 동공이 새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흐려지던 입자가 모여들며 진해졌다.

키누안의 몸이 재차 사라졌다.

‘연속 순간이동!’

키누안은 릭보다 순간이동 유물을 더 능숙하게 사용했다. 놈은 아케인 문명과 기술에 대한 조예가 릭보다 더 깊다. 그간 연구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으며 소리에 집중했다. 입자의 소리는 잡음이 낀 것처럼 들린다. 소리를 알면 거리와 위치도 잴 수 있다.

끼릭!

나는 물리 세계를 왜곡하는 소리를 따라 루이나를 겨누었다. 삼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입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청출…….”

키누안이 나타나며 입을 움직였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투웅! 콰- 앙!

키누안이 있던 지점에서 충격탄의 에너지 폭발이 일었다.

그러나 폭발은 키누안의 말을 막지 못했다.

“……어람이구나, 루카.”

청출어람이라는 말을 마치며 키누안은 뒤로 더 멀리 날아갔다. 그의 몸 주변에는 광자 코팅 형태의 에너지 보호막이 번쩍거리다가 증발했다.

‘빌어먹을!’

나는 욕설을 속으로 내뱉었다.

놈은 몸에 에너지 방어막을 두른 모양이었다. 충격탄의 에너지 폭발에 반응하며 충격을 흡수했다.

빠득.

절로 이가 갈렸다.

짜증이 난다. 고화력 실탄이었으면 방금 키누안을 죽일 수 있었다. 에너지 기반의 화력이 주력인 충격탄이라 놈이 목숨을 건진 것이다.

키잉!

난 재빨리 화광비수 불나방을 던졌다. 불나방은 화광 시리즈처럼 모든 걸 녹이며 관통한다.

팅, 틱!

키누안은 반신만 남은 채로 팔을 움직여서 불나방의 궤도로 조금씩 비틀었다. 그의 팔과 손에 녹아내린 흔적이 남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털썩!

불나방을 막아내던 키누안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유리하다. 절체절명의 위기인 건 키누안이야.’

나는 바위에 발을 대며 단숨에 뛰어서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다리의 출력이 높아지면서 진동이 일었다.

그러나 나는 뛰어나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어. 무언가가…….’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하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큰 도박을 한 건 자네만이 아니네. 자네가 나의 유능함을 믿었듯이, 나도 자넬 믿었어. 오늘 날 뛰어넘을 거라고 말이야.”

키누안이 지껄였다. 난 시선을 하늘에서 떼지 못했다. 맑은 하늘이 무색할 정도로 시커먼 물체가 추락하듯 떨어졌다.

쿠우우우웅-!!

묵빛의 전갑의체가 나와 키누안 사이로 추락했다. 상공의 낙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곧바로 놈이 일어섰다.

얼핏 보면 레기온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전갑의체였다.

등은 살짝 굽었으며 케이블 다발로 머리와 연결된 금속 상자가 기괴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일인군단, 무쉬르 알 카슈라.’

전설의 용병이 돌아왔다.

스륵.

카슈라는 망토가 달린 팔을 들어서 키누안을 지키듯 가렸다.

“나보다 더 젊고 우수한 뇌가 여기에 있네.”

키누안이 상품을 소개하듯 말했다.

“확실히 그렇더군요. 우리의 거래는 성립됐습니다, 키누안.”

카슈라의 전갑의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높아진 출력의 진동으로 바닥의 돌멩이와 먼지가 들썩이고 있었다.

“이번엔 당하지도, 놓치지도 않겠습니다, 루카.”

카슈라의 헬멧에서 두 쌍의 광학 렌즈가 섬뜩한 안광을 내뿜었고, 금속 상자와 연결된 케이블 다발에선 꿀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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