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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은 유능하다.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위험은 유능한 정도로 헤쳐나갈 수 없다.
제국, 길다, 일레이.
이 모두를 피해서 공작을 벌이려면 어둠에 발을 담그고 있는 괴물이 있어야 한다.
‘마녀 바바라.’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의 인물이 여기에 있었다.
바바라는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인재였다. 그녀도 우수하다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괴물이다.
‘폭풍기 이후로 제국의 감시 역량은 크게 나빠졌어. 자신들이 심어둔 첩자가 몇 명이고, 그 첩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지.’
비공식적 임무의 수행원들은 그만큼 상부와의 연결고리가 약하다. 헤일라스 같은 중간 관리자가 증발하면, 제국과 요원을 잇는 보고 체계도 사라지는 셈이다.
‘바바라는 아직도 제국의 첩보원인 건가? 아니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건가?’
내가 가진 정보로는 추측마저 확실하지 않았다. 바바라도 본질은 이중 첩자다.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듯한 행동이 위장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제국의 칼, 그 수뇌부에 바바라가 있다. 그녀가 수장인지 그저 일원인지 알 순 없지만, 조직의 중추라는 건 확실했다.
‘바바라는 여전히 네메시스와 연결되어 있나? 제국의 칼은 네메시스와 연동된 조직? 아니면 하부 조직? 그렇다면 네메시스가 지젤을 통해 제국의 칼을 조직한 건가?’
사고가 폭주하며 온갖 조각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내 뇌를 지금 조사하면, 뇌파가 시뻘겋게 불꽃처럼 튀고 있을 것이다.
내 사고가 멈추지 않았다. 한번 물길이 트이자, 댐이 무너진 듯이 폭주했다.
따각, 따각.
바바라가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와 바바라는 새하얀 공간에 서 있다. 가상 현실은 바바라가 주도권을 가진 세계였다.
진짜 현실에서 나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바바라의 목을 비틀어 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의체를 가지고 있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여긴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널 보면 짜증이 나.”
바바라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식칼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내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어차피 가짜다. 찔려도 죽진 않는다. 서늘한 감촉도 가짜 신호에 불과하다. 몰입 심도도 낮아서 현실의 나에겐 큰 영향이 가지 않을 터다.
난 감각의 일부는 여전히 ‘현실의 랑테’를 주시하는 데 쓰고 있다. 미동도 없는 랑테가 청각 시야로 보였다.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하네. 나도 널 보면 괜히 속이 부글부글 끓거든.”
난 목덜미에 닿은 식칼을 손가락으로 밀며 말했다.
휙.
바바라는 잽싸게 식칼을 반대편 손으로 쥐었고, 칼날을 내 가랑이 사이에 들이밀었다. 가상 현실이라는 걸 알아도 이건 섬뜩했다.
“이 더러운 물건으로 지젤을 범했다고? 아, 끔찍해라! 당장이라도 도려내서 태워버리고 싶네. 루카, 한 번 잘라봐도 될까?”
바바라가 식칼의 날을 내 가랑이 사이로 더 바짝 밀어 올렸다. 정말로 내 중요 부위를 도려낼 기세였다.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지만, 이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군.
‘바바라는 나와 지젤의 관계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날 공격하지 않았다. 지젤에 대한 집착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비합리적인 광기로 날 죽이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일레이가 길다를 암살하려 했을 때, 안드로이드를 해킹해 내게 경고한 것도 바바라다.’
바바라는 내 존재를 진작 인지하고도 공격하지 않았다.
“바바라, 지젤과 무슨 거래를 한 거지?”
“네게 알려줄 이유는 없어. 넌 연적이니까. 연적만 아니라면, 널 제법 좋아했을 텐데. 으으, 끔찍해. 난 네가 죽도록 미워.”
바바라는 흥얼거리듯 악담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식칼도 그만치 멀어졌다.
흠, 괜히 안도하게 된다. 가상 현실이라도 중요 부위가 칼에 찔리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
“넌 나와 협력해야 하는 처지일 거다. 지금 상황을 말해, 지젤을 위해서라도.”
난 감정을 싣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바바라와 무의미하게 감정 소모를 할 때가 아니다.’
랑테의 말에 따르면, 통신 시간은 15분으로 짧았다. 그 시간이 넘어가면 제국의 칼을 추적하는 세력에게 감청당하거나 꼬리를 밟힐 것이다.
“여전히 말은 잘하네. 빌어먹을 반푼이 주제에.”
살면서 이런저런 욕설과 호칭은 많이 들었지만, 반푼이는 처음이로군.
“그러니 반푼이도 알아먹을 수 있게 말해줘.”
난 평정을 유지하며 바바라의 말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지젤과 나는 약속을 했어. 그뿐이야, 루카. 너도 모르는 나와 지젤만의 약속이지. 내 보물을 너한테 알려줄 것 같아?”
바바라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부적절한 욕망을 비꼴 시간조차 내겐 없었다.
“길다를 지키는 것도 약속에 있었던 내용인가? 안드로이드로 내게 경고를 보낸 사람이 너라는 건 알고 있어.”
내 기계적인 어조에 바바라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한숨을 쉬었다.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지젤의 부탁 중 하나였어. 길다를 보호해 줄 것, 내 능력이 닿는 한에서지만.”
지젤은 지앤지 사이버네틱스의 자금을 횡령했다. 바바라를 통해 길다를 보호한 건 나름의 속죄겠지, 아마도.
“뭐, 좋아, 잡설은 치우자고, 바바라. 지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바바라는 날 아래부터 위까지 훑어보다가 도톰한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깨어난 건…… 우리 계획에 없던 일이야. 지젤의 위치? 말해주고 싶어도, 나도 몰라. 너도 알아선 안 되고.”
난 바바라의 목덜미를 쥐고 벽까지 밀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뱃가죽을 찢고 내장을 내 손으로 뭉개버리면서 고문하면 얼마나 짜릿할까. 아는 걸 모두 토해낼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난 날카로운 공격성과 가학성이 깨어나는 걸 자각했다. 바바라는 내 가학성을 유독 자극하는 존재였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바바라. 난 이미 네 꼬리를 잡아냈어. 현실의 너를 찾는 건 시간문제다.”
바바라는 내 협박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비릿하게 웃었다.
“지젤에겐 계획이 있어. 네가 정말로 지젤을 사랑한다면…… 당장 모든 헛짓거리를 집어치우고, 이 우주에서 사라진 듯이 잠적해. 난 이대로 널 함정으로 유인해 죽일 수 있지만, 지젤을 위해 참는 거야. 어쨌든 네가 죽으면 지젤도 같이 죽을 것 같거든.”
많은 단서와 정보가 바바라의 말에서 흘러나왔다. 이것만으로도, 지젤의 행보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
‘행방불명은 자작극이고, 나의 복귀는 지젤의 계획에 없던 내용이다.’
그리고 기밀 유지를 위해 지젤의 위치와 상황은 바바라조차 몰랐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바바라가 지젤을 감금하고선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최악의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지젤을 감금하고 소유했다면, 바바라는 날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이반과 바바라, 나와 지젤.’
이반과 바바라의 집착은 결이 비슷하다. 난 이반과의 밀회를 떠올렸다.
‘이반은 내 자유의지를 속박하지 않고, 나란 존재를 고스란히 곁에 두고 싶다고 했어.’
바바라도 비슷할 것이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인격과 자아, 즉, ‘영혼’을 가진 지젤을 곁에 두고 싶은 것이다.
바바라가 지젤의 외면만 가지고자 했다면, 내키지도 않게 나와 협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바바라의 말 중 하나가 내 심리 방벽을 깊숙이 뚫고 들어왔다.
‘네가 죽으면 지젤도 같이 죽을 것 같거든.’
이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이 헛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지젤이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젤이 자작극을 벌인 거라면, 행방불명 당시에 키누안과 발렉의 개입은 어떻게 된 거지?’
키누안과 발렉의 개입으로 가브리엘의 인생은 망가졌다.
‘키누안이 지젤의 계획을 파악하고 끼어든 건가? 아니면, 지젤은…… 키누안과도 거래를 한 것인가?’
그건 안 될 일이다. 바바라와의 거래는 괜찮다. 하지만 키누안만큼은 손잡으면 안 될 괴물이다. 키누안과 협력한 자는 하나같이 파멸을 피하지 못했다.
‘키누안과 협력했다면, 지젤이 무슨 계획을 세웠든 간에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머릿속이 더욱 맹렬하게 돌아갔다. 머리털마저 타오를 것만 같았다.
‘내가 깨어나면서 지젤의 계획은 꼬였다. 내 복귀는 키누안의 계략이기도 하지.’
가장 끔찍한 상황이다.
‘지젤이 키누안의 손에 있는 것.’
자작극을 벌이려는 지젤을, 키누안이 중간에 낚아챈 거라면?
생각하기 싫다. 제발, 아니길 바란다.
“바바라, ‘키누안’이 지젤을 가로챘…….”
바바라가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어깨까지 떨릴 정도로 웃었다. 나보다 정보에서 앞서 있다는 걸 즐기는 듯했다.
“그건 아니야. 나도 키누안을 알고 있어. 아주 위험한 존재지. 그러나 놈의 가로채기는 내가 막아냈어. 이건 확실해. 키누안은 지젤을 손에 넣지 못했지.”
바바라가 확신이 서린 어조로 말했다. 난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비대하게 커진 키누안의 그림자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무쉬르 알 카슈라를 불러서 막았지. 무쉬르 알 카슈라의 전력은 네가 상대한 게 전부가 아니야. 전설이라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어. 카슈라 때문이라도, 넌 잠적해야 해. 놈이 주력기로 복귀하면, 네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이번엔 좀 놀라도 된다고 생각한다.
전설의 용병, 무쉬르 알 카슈라.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잠든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음모와 계략이 오간 거지.’
단시간에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바바라는 키누안과도 대립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폭풍기의 아크바란과 보더시티에서 수많은 사건 사고를 저지르며 나아간 것처럼…… 지젤과 바바라는 수년 동안 어둠과 안개를 헤쳐나온 것이다.
“루카, 네가 정말로 지젤을 위한다면 내 말을 들어. 나도 너와 협력할 테니까. 모든 건 지젤을 위해서야.”
바바라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시간을 확인하는 듯했다. 15분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우리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다, 바바라.”
바바라는 날 무시하듯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랑테에겐 제국의 칼에 들어오기 위한 조건으로 네게 임무 하나 맡겼다고 전달할 거야. 일단 랑테를 통해 다음 연락을 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에 모두와 연을 끊고서 보더시티를 떠날 준비를 해둬. 지젤의 계획대로라면 넌 10년은 더 잠들어 있어야 했거든.”
바바라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난 그녀를 부여잡고 싶은 헛된 충동을 참았다.
치직, 치지직.
거친 잡음과 함께 내 의식과 감각은 시뮬레이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랑테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내 감각에 와닿고 있었다.
‘랑테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군.’
이것만으로도 랑테의 실력을 가늠할 만했다. 생리적 반사도 조절할 정도로 의체 통제가 완벽했다. 초라한 행색과 달리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내 의식이 시뮬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칫!
강렬한 신호음과 함께 바바라의 형체가 귀신처럼 내 망막에 나타났다. 그녀는 표독스레 눈을 부라리며 식칼을 쥐고 있었다.
-역시, 그냥 보내진 못하겠어. 감히, 내 지젤을, 그 역겨운 살덩어리로 꿰뚫어?
……가상 현실은 바바라의 무대다. 이길 도리가 없지.
난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였다, 염병할.
푹.
가랑이 사이로 열상과도 같은 통증이 퍼졌다.
젠장, 진정해라, 루카. 이건 가짜 경험이다.
머리론 알고 있다. 하지만 끔찍한 경험이다. 시뮬레이션과 현실을 분리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트라우마가 생겨 발기부전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훈련받은 나도…….
“크읏, 윽.”
난 짧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낡은 천장이 보였다.
“깨어났군. 나도 방금 ‘머리’에게 전언을 들었…….”
난 랑테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급하게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식은땀이 몸에서 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랫도리가 무사히 달려있긴 하다. 그러나 찬물에 담근 듯이 잔뜩 쪼그라들어 있었다.
부디, 당장 시험하지 못할 기능이 때가 되면 잘 작동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