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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63

263
제국의 황실에 직속 첩보부대나 첩보원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온갖 비밀이 그득한 제국이니까.

지금 이스마엘이 놀란 건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루카 씨가…… 황실의 첩보원이었습니까?”

아직도 이스마엘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저는 프란세크 황태자와 함께 사실상 반역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건 뇌사나 다름없는 재기불능 상태가 됐기 때문이죠.”

나는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설명했다. 표면적인 이야기의 앞뒤는 전부 맞아떨어질 것이다.

연방의 정보력이 아무리 우수해 봐야, 폭풍기의 내막까진 알 순 없다.

“여러 사정이 있지만, 짧게 설명하자면 현 황제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과 제 지인들이 절 빼돌려 극적으로 치료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제 복귀 사실이 제국에 알려졌고, 전 제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연방에 망명 신청했죠.”

“이야기가…… 벅차군요.”

이스마엘은 내 말을 제지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치도 못했을 터다.

‘이스마엘은 보얀을 미끼로 이런저런 제안을 하며 날 옭아매려고 했겠지.’

지금은 이스마엘에게 주도권을 줄 생각은 없다.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되는 상황이다.

‘주변의 상황을 내 의도대로 끌어가야 한다.’

난 과감하게 정보를 이스마엘에게 내주면서 흔들었다.

“차관님과 연방 정부의 목적이 프란세크의 즉위라면, 전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사가 있습니다. 다만, 제게 어느 정도의 자율권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어디까지나 루카 씨는 제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상부의 요구였고요.”

이스마엘이 내 기세에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제국의 칼은 자존심이 강한 근위대원 중심으로 이뤄진 조직입니다. 현 황제인 이반 크라치아를 싫어하는 것뿐이고, 애국자이지 매국노가 아니죠. 제가 연방의 개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할 겁니다.”

이스마엘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갔다. 그는 빼앗기는 주도권을 되찾아오고 날 통제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터다.

“잠시, 뭐, 일단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요.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이스마엘은 최대한 뜸을 들이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제가 보더시티 바깥에서도 움직일 수 있게 허가와 지원을 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제국의 칼 동태를 살피며 차관님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제국의 칼은 연방의 존재를 동맹으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쪽과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모양새가 되겠죠.”

이스마엘은 숨을 돌리더니 말을 차분히 내뱉었다.

“제가 다소 삐딱하게 들은 걸 수도 있지만, 루카 씨가 연방의 통제에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위기 상황에서는 저와 연방을 이용하고서요.”

이스마엘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는 내 목줄을 쉽사리 놓지 않았다.

난 부정도 긍정도 없이 내 말만 이어갔다.

“제국의 칼과 접촉했을 때의 분위기를 보면, 그쪽에선 승부수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차관님은 무기와 장비만 간접적으로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준비만 해주시면, 제가 제국의 칼에게 연방의 보급 차량을 습격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차관님, 큰 이익을 위해선 그만한 도박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스마엘은 턱을 매만졌다.

난 그를 재촉하듯 주변을 살폈다. 여긴 기밀과 비밀을 오래 떠들만한 공간이 아니다.

“흠, 제가 전적으로 루카 씨를 믿어야 성립되는 도박이죠. 제가 당신에게 제국의 칼에 접촉하라고 했지만, 제 예상보다 지나치게 일이 빠르군요. 인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요.”

이스마엘은 깍지를 끼며 초조함으로 미동하는 손가락을 감췄다.

“제 설득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진 차관님의 판단이죠.”

이스마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깍지를 풀더니 양 손가락을 딱, 딱, 딱 규칙적으로 부딪혔다. 자신만의 생각 정리법일 것이다.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예리한 비수가 이스마엘의 입에서 흘러나오려 했다.

“……루카 씨는 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세력에게도 협조하고 있을 것 같군요. 자신이 주도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이용하기 위해서 말이죠. 어디서 어디까지 내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스마엘은 내게 흔들리지 않았다. 충격적인 정보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진의를 짚어냈다.

‘젠장. 이 양반, 출세하겠군.’

죽지만 않으면 위로 올라갈 인간이다.

윗사람에게 필요한 능력은 정보 수집력이 아니라 올바른 정보를 걸러내는 판단력과 이를 통해 본질을 낚아채는 통찰력이다.

솔직히, 이스마엘의 기량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번엔 내가 흔들릴 뻔했다.

난 좋게 말해서는 균형자, 나쁘게 말하자면 박쥐 같은 짓을 하고 있다.

나는 이스마엘을 어찌 더 설득할지 고민했다. 그 찰나에 이스마엘이 말을 내뱉었다.

“좋습니다, 루카 씨. 목줄을 느슨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죠.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큰 이익을 위해선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죠.”

이스마엘은 미소가 새겨진 가면을 쓰듯 방긋 웃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의도를 읽기 힘들어, 빌어먹을.’

주도권을 갑자기 빼앗긴 느낌이었다. 분명히 결과는 내 의도대로 됐는데, 이스마엘에게 말려든 기분이었다.

“루카 씨, 저는 윗선에 당신이 제국의 칼에 잠입했다는 보고를 당장은 하지 않겠습니다. 보다시피 이쪽도 보안이 철저한 편은 아니니까요.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은 게 좋죠. 이건 오로지 당신과 저만의 거래이고, 루카 씨도 오명과 위험을 감당해야 할 겁니다.”

나는 이스마엘이 말하는 오명과 위험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하.’

익숙한 상황이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어느 조직이나 하는 짓이다. 꼬리가 물리면 잘라내면 그만이지!

즉, 일이 꼬이면 증거를 인멸해 없던 일로 만든다는 뜻이다.

‘여차하면 내게 전부 뒤집어씌워 처리하겠다는 거로군.’

어쨌든 나쁘진 않다.

난 이스마엘에게 구두로나마 협력을 얻어냈다. 다음은 이걸 토대로 제국의 칼에게 제안할 차례였다. 이곳저곳을 오간 제안은 눈덩이가 굴러가듯 점차 커질 터다.

갑작스레 키누안이 떠오른다.

아마, 키누안도 이렇게 행동했었겠지.

* * *

자고 일어난 나는 홀로그램 신문을 보았다.

오늘 기사 구석에서 보얀과 이스마엘의 사진이 있었다. 어색한 표정의 보얀 곁에는 이스마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략무기연구부에서 크롤러를 특채한 이유는?

-전투원이나 현장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채용. 이례적인 경우…….

-‘종족에 대한 역할 고정과 편견은 없어야 한다.’ ‘크롤러도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 있어.’ 이스마엘 라 차관의 적극적 지지가 보여.

작게나마 화제가 되고 있었다. 이 기세를 불리느냐 마느냐는 보얀과 이스마엘이 하기 나름이다.

‘난 방아쇠를 당겼다.’

어찌 됐건 제국의 칼은 지젤의 행방과 가장 가까운 조직이다.

‘제국의 칼 수뇌부에 지젤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젤의 행방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제국의 공작으로 지젤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지젤이 제국의 손아귀에 있다면, 이반은 벌써 그 카드를 내게 내밀었을 것이다.

이반이 지젤을 카드로 쓰지 않았다는 건, 지젤은 제국의 공작 때문에 사라진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지젤의 행방은 제국의 칼이 알고 있을 터다. 난 그들의 신뢰를 얻고 중추로 가야 한다.

‘제일 이상적인 상황은 랑테의 설득만으로 지젤의 행방을 알아내는 거지.’

나는 랑테가 약속한 열흘을 기다렸다. 기일이 지나자마자, 랑테는 거리를 배회하는 나에게 접촉했다.

인파 사이에서 나타난 랑테는 말없이 내 앞에 섰다.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우린 지하기지로 가지 않았다. 랑테가 향한 곳은 오락거리로 가득한 번화가였다. 속된 말로 보더시티의…… 젊음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이종족 격투시합, 각종 가상 시뮬레이션 체험실, 희귀 생물 전시회 등등, 온갖 볼거리와 체험장이 좌우 위아래로 길게 이어진 거리였다.

겉보기엔 화려해도 골목길은 음습한 법이다.

끼이익.

골목길로 꺾어 들어간 랑테는 오래된 시뮬레이션 가게의 문을 열었다. 위치도 나쁜 데다가 간판마저 조명 하나 없이 낡아서 눈에 띄지도 않는 가게였다.

들어가니 수십 년이 지난 듯한 구형 시뮬레이션 기기들이 먼저 보였다. 안쪽으로 가봐도 제대로 된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노숙자나 다름없는 자들이 성인용 시뮬레이션을 즐긴 뒤에 바지도 벗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구겨진 휴지에서 악취가 노릿하게 풍겼다.

“46번 좌석으로 가 있게.”

랑테가 내게 속삭이며 말했다. 그는 벽에 꽂힌 시뮬레이션 칩 중 하나를 뽑아서 계산을 마쳤다.

털썩.

난 46번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머리에 쓰는 간이 시뮬레이션 기기를 장착하고 고글을 내렸다.

다가온 랑테는 칩을 기기에 꽂더니 설명했다.

“이 기기는 시뮬레이션 기기처럼 보이지만 조직의 통신 장치네. 이 칩을 꽂으면 내부 네트워크로 ‘머리’쪽 사람과 직결되지. 통신은 딱 15분이야. 난 자네가 우리와 무사히 합류하길 바라네.”

그리 말하면서 랑테는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의 손이 외투 안으로 들어갔고, 허름한 외투는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무기와 장비를 외투 아래에 숨기고 있어. 일이 잘못되면 날 죽이거나, 적어도 제압할 생각이겠지.’

난 랑테에게 뒤를 빼앗겼다.

랑테 수준의 실력자를 상대로 선수를 내준다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여기까지 왔다. 물러날 곳은 없다. 준비해 둘 건 다 해뒀다.

기이잉.

가상 시뮬레이션 기기가 작동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재생이 아니라 가상 현실을 기반으로 한 통신 네트워크가 열렸다.

치직, 기긱, 칙.

불안전한 네트워크 특유의 잡음이 퍼졌다. 고글의 화면도 지직거린다. 난 불편한 감각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난 감각의 일부를 랑테에게 할당하듯 곤두세웠다. 랑테는 미동도 없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칼을 든 사형수에게 목을 맡긴 기분이다.

스륵.

나도 손가락을 더듬어 무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점차 가상 현실 통신이 뚜렷해졌다. 가상 현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단순한 공간이 내 시각과 청각을 지배했다.

수우욱.

미끄럼틀에 빠지듯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난 통제력을 발휘해 현실에 감각을 최대한 남겨뒀다.

……새하얀 공간이 보였다. 지극히 단순한 공간이었다.

또각, 또각.

가상 신호가 내 청각을 자극했다. 뇌는 그 소리가 현실인 것처럼 속고 있었다.

“드디어 날 찾아냈네, 루카.”

발걸음에 이어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간의 일부가 일그러지며 사람의 형태를 빚어냈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검푸른 머리카락이었다.

스륵.

검푸른 머리카락은 예전보다 길게 흐느적거렸다. 예전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아니, 소녀의 티를 벗어낸 여인이 내 앞에 섰다.

찰나의 사고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만에 머리가 터질 것처럼 열이 찼다.

‘의심해라.’

난 뇌에 명령을 내리듯 그 말을 되새겼다.

이상하다. 이질적이다. 지젤이 제국의 칼에 잔류하고 아직 수뇌부로 활동하고 있을 리가 없다.

‘지젤이 현역으로 제국의 칼에서 머리로 활동하고 있다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조각이 너무나 많다.’

가상 현실이지만, 난 눈앞의 존재가 지젤이라고 믿고 싶었다. 여기서 이렇게 쉽게 지젤을 만난다고? 달콤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복한 현실을 믿기엔…… 지나치게 냉소적인 인간이었다.

그간의 단서와 조각을 모아보자, 비어있는 조각은 몇 없다. 소거법만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정도다.

“오랜만이다, 바바라. 아니, 오랜만까진 아니던가?”

이게 내 결론이다.

지젤의 형태가 일그러졌다. 뭉글뭉글하게 꼬인 주황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가상 현실에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잃어버린 몸도 구현할 수 있겠지.

“……히히, 여전히, 똑똑해, 루카.”

바바라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가상 현실의 이미지지만, 그녀의 반대편 손아귀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그 식칼이 뭘 상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미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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