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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만, 과거의 이야기를 해보자.
집중하니, 색이 바랬던 기억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색채를 되찾았다.
내 과거는 썩어가는 피를 얼린 듯한 검붉은 기억이다.
나는 생도 시절을 떠올렸다.
장식 하나 없이 건조한 천장과 벽, 부딪히면 피부가 찔릴 듯한 각이 매서운 가구들, 앉아 있으면 엉덩이와 허벅지가 저린 철제 의자.
훈련소 건물의 어딜 가도 보이는 색깔이라곤, 보랏빛, 파란색, 검은색, 붉은색, 은회색 따위였다. 멀쩡한 사람조차 우울증 말기로 몰아갈 듯한 색 배합이다.
훈련소에선 나와 똑같은 부류의 소년들이 오가고 있었다.
선별검사로 뽑힌 살인의 영재들.
타인에 대한 높은 공격성을 갖췄으며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낮다. 낮은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수직적 계층 구조에 대한 수용성은 높으며, 신경계 화학 처리를 견딜 정도의…… 등등.
제국이 원하는 살인 기계의 조건을 갖춘 자만이 근위대 생도가 된다.
근위대에선 살인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폭력을 참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도리어 우리의 타고난 공격성을 화학 약물과 정신 교육으로 더 비대하게 키워냈다.
비대한 공격성은 넘치기 직전까지 이르렀고, 근위대에서는 그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발산하는 법을 가르쳤다.
나와 같은 생도들은 비대하게 커진 공격성을 끌어모아 외부로 표출하며 해소했다.
‘내게 통용된 방식이 크롤러인 보얀에게도 먹힐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난 내가 배우고 해본 방식만 알 뿐이다. 다른 방법은 모른다.
‘쓰면 쓸수록 근육은 발달하듯, 발산하고 사용할수록 통제력이 올라간다.’
무작정 참는다고 통제력이 올라가는 게 아니다. 채우고 비우는 과정에서, 우린 통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와라, 보얀.’
보얀은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로 내게 달려들었다. 큼직한 동작으로 내게 주먹을 뻗었다.
터- 엉!
보얀의 주먹과 내 팔뚝이 부딪혔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신체라면 충격을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신체와 반응성이 아무리 우수해도…….’
보얀은 싸움 경험도 적고, 훈련받지 못한 자다. 단순해서 읽기 쉬웠다.
내 눈에는 보얀을 ‘즉사’시킬 수많은 동작이 보였다. 보얀을 죽이는 내 모습이 수십 개의 잔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 역량을 가늠하는 능력의 부족.’
놈은 그저 감정적 흥분으로 달려든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죽고 말 터다.
‘보얀은 자신의 폭력에 취해있다. 자신이 강하다는 건 은연중에 자각하고 있어. 다른 크롤러와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알량한 방어기제로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있는 거지.’
생도 시절의 내 교관과 상관들은 자신의 역량이 압도적으로 우수하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그 때문에 난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제압하는 게 아니라, 모든 역량을 여유 있게 받아내야 한다.’
보얀은 넘치는 공격성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없을 터다. 과부하로 신경계는 지쳐 가고, 육체의 손상은 커지겠지.
팃!
난 보얀의 연타를 옆으로 흘렸다. 이대로 놈의 복부에 주먹을 꽂을 수도 있지만 참았다.
생물에게 공격 태세는 ‘비정상’이다. 공격 태세는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행위다. 그걸 오래 유지하는 것도 훈련의 일부다.
‘느려지고 있군. 기세도 약해졌어.’
이어지는 살의가 흐릿하다. 공격은 생동감이 없고 기계적이었다.
보얀에게 풍기던 전의의 맥이 끊어지고 있었다.
휘릭!
내가 보얀의 팔을 잡아끌며 녀석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카악!”
살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며칠은 절뚝거려야 하겠지.
‘공부해야 하니, 오른팔은 남겨두고.’
난 보얀의 왼팔을 잡아서 무릎으로 강타했다. 크롤러가 아무리 튼튼해도 쇳덩이보단 약하다.
빠각!
깔끔하게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젊은 크롤러니 금방 붙겠지.
퉁!
나는 손바닥 밑부분으로 보얀의 턱을 가격했다. 연이은 내 공격에 보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역시 튼튼해. 레고르의 자식답다.’
난 방금 일격으로 보얀을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보얀은 용케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격으로 끝이다.
난 뻗은 손바닥을 말아쥐며 반대편 손바닥으로 맞잡았다. 그리곤 팔꿈치를 짧게 휘둘러 보얀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빠각!
보얀이 총이라도 얻어맞은 듯이 휘청거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몸풀기로는 나쁘지 않았어, 보얀.”
난 뒤로 물러났다. 기절한 보얀은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털썩.
나는 벽을 따라 설치된 벤치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보얀은 전투 훈련을 받아야 한다. 전사가 되고 싶지 않아도 타고난 본능은 어쩔 수 없어.’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의 인류는 끈질긴 사냥꾼이었다. 하루 종일 걷고 뛰며 사냥감을 추적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인간은 꾸준히 뛰고 걷지 않으면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
‘격렬한 전투는 보얀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거다.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며 쌓아뒀다간 끔찍한 방향으로 발현돼.’
난 제국의 귀족들을 알고 있다. 전신의체의 귀족들은 인간적인 감정을 부정하며 내면에 차곡차곡 눌러 담았다. 제때 발산하지 못한 감정은 부패했고, 훗날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끈적하게 새어 나왔다.
‘나도 크게 보면 다를 바 없어. 적절하게 공격성을 분출하지 못하면 내 정신이 뒤틀리기 시작하지.’
내가 물통을 절반 비울 즈음에 보얀이 꿈틀거렸다. 난 놈의 머리에 남은 물을 쏟았다.
“보얀, 누가 뭐래도 넌 싸움과 투쟁에 끌리고 있다. 본능은 거부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거야. 이해했으면 내게 훈련을 받으러 와라.”
난 보얀이 듣든 말든 그리 말하면서 훈련실을 나가려 했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보얀에게서 신음과도 같은 한마디가 나왔다.
“감, 사합니다, 루카 씨.”
* * *
보얀을 두들겨 팬 뒤로 이틀이 더 지났다. 내 단말기는 간만에 희소식으로 울렸다.
삑.
라피스 라줄리가 의식을 회복했다. 그녀는 폭발에 휘말려 왼팔과 왼쪽 다리를 잃었고, 죽음 문턱까지 닿았다가 현세로 되돌아왔다.
‘병문안을 온 사람이 많군.’
벤치에 앉은 나는 라피스의 병실을 멀찍이서 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쟈파 상사의 직원이나 간부들이 병문안을 앞서 왔다. 쟈파 상사와 관련이 없는 지인도 다수였고, 동족인 타르파를 비롯해 여러 종족이 있었다. 라피스의 행실과 인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삑.
복도의 승강기가 열렸다. 난 매캐한 냄새로 누가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손석재.’
손석재가 라피스의 회복을 듣고선 병문안을 왔다. 그 옆의 젊은 남자 비서는 병문안 선물인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 루카 씨도 계셨군요. 혼자 들어가기 민망했는데 참 잘 됐습니다.”
손석재가 태연하게 내 앞에 앉았다.
“라피스가 네 병문안을 반기지 않을 텐데?”
“반기든 안 반기든 도리는 다해야죠. 제 부하가 저지른 일이니까요.”
난 코웃음을 치며 뒷머리를 벽에 기댔다.
“댁은 참 천연덕스러운 악당이야. 존경스러울 정도로.”
내 비난에도 손석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명은 익숙합니다.”
난 손석재와 말을 섞지 않고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먼저 온 방문객이 전부 빠졌다.
끼익.
내가 먼저 병실로 들어갔고, 손석재가 뒤를 따랐다.
“루…….”
라피스는 날 반기다가 손석재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두들겨 패서 쫓아낼까?”
내가 그리 말하자, 라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라피스 곁에 앉은 나와 손석재는 폭발의 범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 대리에 대한 일이었다.
“오 대리는 우리 쪽에서 처리했습니다. 증인은 여기에 있는 루카 씨죠.”
라피스는 복수했다는 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거악을 품은 나무는 나날이 커지는데, 그 가지만 자른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해입니다, 라피스 양.”
라피스가 손석재를 노려봤다.
“추악한 과거를 덮어두고, 덮지 못한 죄는 아랫사람에게 전가한 채로 당신만 위로 올라갈 생각이시겠죠. 사람들은 당신의 뻔뻔함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손석재는 비서에게 손짓했다. 비서는 향기가 넘치는 꽃다발을 탁자에 내려두었다.
“당사가 쟈파 상사만큼의 재력과 힘은 없지만, 능력이 닿는 한 라피스 양의 재활과 치료를 돕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죠.”
손석재가 종이 명함을 꽃다발에 꽂으며 일어섰다. 그는 신사처럼 나와 라피스에게 작별을 고하더니 사라졌다.
꾸깃.
나는 손석재가 사라지자마자 명함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꽃도 버릴까?”
“그냥 놔둬 주세요. 꽃이 잘못된 건 아니니까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강 들었어요. 쟈파 님도…….”
“네가 깨어났듯이 쟈파도 곧 회복할 거야. 지금도 간간이 깨어나서 회사의 방침을 정하고 있고.”
라피스는 자신의 왼팔과 왼쪽 다리가 있어야 할 부분을 응시했다. 절단면은 붕대만 칭칭 감겨 있었다.
“이참에 저도 의수와 의족을 하나씩 달아볼 생각이에요. 직접 써보면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겠죠. 의수가 있으면 더 정밀한 작업도 할 수 있을 거고요.”
“요즘 세상에 팔다리 하나둘 없는 건 흠도 아니지.”
라피스가 손을 입술에 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라피스는 내가 자리를 뜨기 전에 조언했다.
“루카, 조심해요. 오늘 찾아온 제 타르파 친구 중에 큰 뿔을 가진 분이 있어요. 그분이 말하길, 근래 불길한 예감이 계속 든대요. 보더시티 전체에서 재앙의 전조가 감돈다고 했어요. 제게도 당분간 보더시티에서 벗어나길 권하더라고요. 전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요.”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타르파 종족에는 몇 가지 외형 특징이 있다. 유형성숙이 두드러지는 앳된 외모, 흰자위가 없는 검은색 눈동자, 그리고 푸른 피부와 뭉툭한 뿔 한 쌍.
‘뿔이 큰 타르파는 동족에게 존중을 받는다. 타르파 종족에게 뿔은 큰 의미가 있어.’
노엘 뮬리즈카의 기억에서도 뿔이 큰 타르파가 나온 적이 있었다.
“타르파는 뿔이 클수록 예지에 가까운 직감이 발달하거든요. 신비로운 제6의 감각이죠.”
라피스가 자신의 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내 궁금증을 빠르게 눈치챈 것이다.
“기억해 두지. 그리고 네 쪽을 향해선 통신을 항상 열어둘 테니까, 일이 생기면 바로 호출해.”
그렇게 병문안을 마친 나는 병원 건물을 나갔다. 거리가 어둑했다.
나는 요기나 하고 들어갈 것처럼 노점상이 늘어진 거리를 잠시 배회했다.
‘누구지?’
난 병원에서 나올 때부터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인파 사이에서 날 쫓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꼬치를 파는 노점상 앞에 섰다. 노점상의 낡은 거울 너머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것으로.’
나는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꼬치를 골랐다.
삐빅.
크레딧칩으로 결제를 마친 나는 정체불명의 덩어리 고기가 꽂힌 꼬치를 들고선 골목길로 들어갔다.
툭, 투둑.
난 꼬치에 꽂힌 고깃덩이를 빼서 안쪽으로 던지며 굴렀다. 따끈한 냄새가 멀어지고 있었다.
강렬한 냄새를 추적했다면 내가 멀리 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 둘, 셋…….’
벽에 등을 붙인 내가 속으로 숫자를 셌다. 그리고 골목길로 들어오는 자의 멱살을 단숨에 잡아채려 했다.
휘릭!
상대도 내 손목을 양손으로 잡더니 재빨리 꺾어서 비틀려 했다.
나는 팔을 빼는 척하며 상대의 무릎을 노렸다. 상대가 노림을 당한 발을 뒤로 뺐다.
‘놈의 대응이 빠르다.’
나도 놀랐다. 상당한 솜씨였다.
‘무기를 뽑을까?’
맨손으로 제압해서 신문하려던 내 계획은 실패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자네와 싸울 생각은 없네.”
사내가 뒤로 물러난 채로 말했다. 그가 두건을 뒤로 젖히더니 날 보았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하게 낯이 익은 사내였다.
제때 교체하지 못한 인공 피부의 결은 투박하게 군데군데 갈라졌고, 입가와 눈가에는 접힌 주름이 있었다.
“근, 아니, 전 근위대원이십니까? 대장님의 곁에 있던?”
내 기억과 직관이 어렴풋이 겹쳤다. 헤일라스의 곁에 있던 측근 중 한 명과 느낌이 비슷했다.
“정말로 자네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