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가까운 장래에, 보얀의 눈높이는 나보다 위로 올라갈 터다. 좌우로는 이미 나보다 컸다.
‘성장기의 보얀은 자신보다도 덩치가 큰 크롤러를 쓰러뜨렸다.’
이건 특기할 만한 일이다. 보얀은 전투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육체의 잠재력은 더 남아 있었다.
‘일류의 자질.’
레고르가 지금의 보얀을 보면 기뻐할까, 아니면 허탈하게 웃을까, 그것도 아니면 분노할까.
휘릭!
보얀은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보았다. 폭력의 갈증을 채울 사냥감이 더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첫 경험의 고양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야, 야나카까지?”
보얀은 야나카를 보더니 정신을 차렸는지 화들짝 놀라서 원형 탁자 뒤로 숨었다. 덩치가 커져서 몸의 테두리가 전부 드러났다.
내겐 몰라도, 야나카에게 야성의 날것을 보여주는 건 민망했던 모양이다.
보얀의 눈동자에선 고양감이 식어갔고, 이성의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으면 수습해라. 사람이 둘이나 죽었어. 이런 곳이니 정부가 네게 죄를 묻진 않겠지만…… 널 목격한 생존자가 있으니 네게 보복하러 올 거다.”
“보, 보복요? 사, 사람이 죽었고요?”
보얀이 바보처럼 굴고 있다.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싶었다.
“보복이 걱정되면 전부 죽이면 돼. 목격자가 없어지면 누구의 짓인지도 모를 테니까. 넌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내가 해치우지. 말만 해. 보호자로서 이 정돈 해줄 수 있지. 사람 죽이는 일은 또 내가 전문가잖아.”
내가 키득키득 웃으며 쓰러진 갱단원들을 툭툭 찼다. 의식이 있는 이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죽, 죽일 것까진, 아니, 제가 사람을…….”
보얀은 학습된 도덕성을 뒤늦게 일깨웠다.
“이놈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 우린 몰라. 생각보다 거물이 있을 수 있지. 뒷골목에는 여러 이유로 은둔한 강자들이 종종 있으니까. 야나카의 얼굴과 이름도 방금 팔렸어. 밤의 불놀이도 이젠 끝일 수 있지.”
내가 야나카를 언급하자 보얀의 표정이 변했다. 살의가 잠시나마 맴돌았다.
‘크롤러의 성장은 참 빠르군.’
사춘기에 접어든 보얀의 변화는 두드러졌다. 호르몬의 변화로 공격성이 깨어나고 있었다.
야나카가 재빨리 나와 보얀 사이를 끼어들었다. 그녀는 애써 시신들을 보지 못한 척했다.
“당신, 거짓말을 섞어가며 보얀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 그러고도 보호자야?”
야나카가 내게 삿대질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내 소속은 연방 정부고, 당신과 보얀은 쟈파 상사쪽 인물이잖아. 보복하려고 들었다간 이쪽 갱단이 송두리째 뽑히겠지.”
야나카가 고개를 휙 돌려서 보얀을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별 이유 없이 싸우진 않았을 거 아니야.”
야나카는 총명하게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 나도 흥이 식어서 관망했다.
보얀은 가게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서 손발과 얼굴을 씻어서 핏자국을 지웠다.
정리를 마친 우리는 쓰러진 갱단원을 놔둔 채로 골목을 벗어났다.
바들, 바들.
전투의 고양감에서 벗어난 보얀이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손가락과 턱 같은 신체 말단부터 떨렸다.
“왜 싸운 거지? 약을 구하러 간 게 아니었어?”
나는 덤덤하게 물었다.
“……저들이 절 속였어요.”
보얀이 주머니를 뒤적여 알약을 꺼냈다. 가게에서 구입한 각성제인 듯했다.
“가짜라도 판 거야?”
보얀이 고개를 저었다.
“전투용으로 배합한 각성제예요. 제 주문과 다르게 멋대로 바꿔서 제게 넘겼죠. 그걸 따졌더니…….”
“그래서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일어난 거로군.”
“맞아요. 그 약물 때문에 제가 이상해졌어요.”
나는 손을 뻗어서 보얀의 손아귀에 있는 알약을 낚아챘다.
툭.
나는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린 채로 알약을 쪼갰다. 가루가 내 입안으로 떨어졌다.
“루카 씨?”
보얀이 당황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조용히 하라고 했다.
전투용 각성제라면 반응이 빠를 것이다. 나도 뇌 신경계 자각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이다.
난 눈을 감고 내면의 변화에 집중했다. 전투용 각성제는 사람을 포악하게 만든다. 크롤러는 나와 종족이 다르지만, 약물 반응성은 인간과 결이 비슷하다.
‘성분 조사를 해봐야겠군.’
나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이건 먹지 마. 내가 압수하겠다.”
난 보얀의 약을 빼앗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야나카가 다른 각성제를 가져왔으니 당분간 쓸 건 있을 터다.
난 쟈파 상사의 사옥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쟈파 피자 15호점에 들러서 요기하며 음료를 마셨다.
‘지금 애새끼 돌볼 때냐, 루카.’
날 탓하는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 나는 통구이 뱀 한 마리가 통째로 올라간 피자를 바라보며 탄산음료를 마셨다.
으적, 으적.
보얀은 몹시 배가 고팠는지 피자를 마시듯 해치우며 뱀도 뼈 채로 씹어 먹었다.
“여기, 한 판, 아니 세 판은 더 줘.”
내가 손을 들어서 종업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야나카와 보얀은 그간의 근황에 대해서 물어보며 여느 아이들처럼 떠들어댔다.
“모임에 나오지 않을 생각이야?”
“나가기 힘들어. 요새 몸이 좀 이상해서…….”
보얀이 손가락을 쪽 빨며 말했다. 그의 동공이 잠시 주방으로 향했다. 음식이 급한 모양이었다.
휙.
난 내 접시에 얹어둔 피자 조각을 보얀에게 던졌다. 보얀은…… 놀라지도 않고 입으로 피자를 받아먹었다. 반사신경이 훌륭하군.
“상태가 좋을 때만 오면 돼.”
“노력해 볼게.”
보얀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으나 야나카는 눈을 찡그리며 강조했다.
“노력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이야. 내가 약은 대신 구해줄게.”
“병원 약은 약해서 소용이…….”
“병원 약이 아니거든. 연방의 최고 엘리트가 크롤러에게 맞게 배합한 고순도의 각성제야. 성분도 불명확한 뒷골목의 약보단 훨씬 낫지.”
야나카는 애초의 목적이었던 각성제를 보얀에게 건넸다. 보얀은 반신반의하며 알약을 받았다.
나는 야나카와 보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료를 빨대로 마셨다.
보얀의 성적은 나날이 오르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주목할 정도라고 했다. 크롤러라는 특이점 때문이었다.
“둘이서 놀고 알아서 기어들어 와. 난 가보도록 하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루카 씨가 가면 저도…….”
보얀도 날 따라오려고 했으나 야나카가 보얀의 손목을 잡아서 앉혔다.
난 그 둘을 내버려두고 쟈파 피자 가게를 나섰다.
-뱀, 뱀, 뱀…….
입구에선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난 가야의 병원을 찾아갔다.
가브리엘이 없으니 이제는 들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나 세상일은 역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법이다.
“개인 상담입니까? 잘 아시겠지만, 상담은 항상 예약제입니다.”
병원 입구에선 가야가 의외라는 듯이 날 바라봤다.
“상담? 농담도, 참. 난 나 자신을 잘 알아.”
“사람들의 착각이죠.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 말입니다. 전문가도 자신에 관해서는 타인에게 상담을 받습니다. 자아와 자의식은 주관적이니까요.”
“훈계는 됐어, 가야 선생. 여기도 꼴에 병원이니까, 이런저런 설비가 있겠지? 그쪽도 약물은 전문가일 거고.”
“기본적인 건 있습니다. 총에 맞거나 팔다리가 잘린 채로, 다짜고짜 찾아와서 수술해 달라는 사람도 종종 있거든요. 그 사람들 눈에는 병원이면 다 같은 병원처럼 보이는 거죠.”
“그래도 수술은 했다는 뜻이로군.”
“배우긴 했으니까요. 어차피 제가 그 자리에서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들도 있었고요. 일단 들어오시죠.”
가야는 등을 돌리며 병원 내부의 복도를 걸었다. 코라 신성국 특유의 백의가 펑퍼짐하게 흐느적거렸다.
“이 알약의 성분을 조사해 줘. 각성제 기반의 배합 약물이다.”
“약물이라면 당신도 제법 전문가가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성분 분석기가 있긴 합니다. 약물 중독자 치료용으로요. 복용 약물의 성분을 확실히 알아야 치료가 쉽거든요.”
가야가 기계설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말끔한 백색 의료기기들이 옅은 진동을 내고 있었다.
“제가 성분 분석하는 동안, 손님맞이나 해주시죠. 예약한 환자가 곧 한 명 올 겁니다.”
“내가?”
“상부상조하셔야죠.”
“아니, 뭐 못할 건 없지만, 나보고 환자를 상대하라는 소리인가? 아…….”
가야가 내 성격을 모를 리 없다. 난 눈을 깜빡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는 사람이 오는 거로군. 앙귀스 레지나가 네게 상담을 받는 건가?”
내 추측에 가야도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웃었다.
“이렇게 빨리 맞히실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도 여간내기가 아니군요.”
“칭찬해도 나올 건 없어.”
가야는 내게서 받은 알약을 기계에 집어넣더니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조작했다.
“15분 정도만, 앙귀스 레지나 양을 상대해 주시면 됩니다.”
난 물끄러미 가야를 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가야도 날 빤히 쳐다봤다. 어서 가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이었다.
“……그래, 상부상조하자고.”
복도로 나간 내가 병원 입구까지 되돌아갔다.
‘어차피 설비만 작동시키고 나중에 결과를 확인하면 될 일이다. 나한테 앙귀스 레지나를 마중하게 할 필요는 없어.’
난 알면서도 군말하지 않았다. 상부상조인 법이니까.
‘앙귀스 레지나와 내가 대면하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병원 입구에서 몇 분을 기다리니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난 문을 열고 앙귀스 레지나를 마중했다.
“당신이 어째서?”
앙귀스 레지나는 몸을 대부분 가리는 복장으로 서 있었다. 모자도 푹 눌러쓰고 하관도 마스크로 숨겼다.
“일일 아르바이트 중이야. 가야 선생님은 잠시 일이 있어서 좀 늦을 거고.”
“하, 하핫.”
앙귀스 레지나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저벅, 저벅.
복도를 걷는 발소리는 차분했다.
“같이 있던 여자애는요?”
앙귀스 레지나가 먼저 입을 뗐다.
“보얀과 놀고 있어.”
“보얀의 여자친구예요? 귀엽던데.”
“여자친구는 무슨, 크롤러와 인간이잖아.”
“은근히 편견이 심하시네요.”
“편견이 아니라 상식이지.”
“그게 편견이에요.”
우린 허술한 대화를 하면서 상담실로 들어갔다. 편안한 분위기의 상담실이었다.
“곧 가야가 올 거야. 그때까지만 말 상대를 해주지.”
난 소파에 먼저 앉으며 잔에 물을 따랐다.
“오늘은 좀 친절하시네요. 뭐 잘못 먹었어요?”
앙귀스 레지나가 외투를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답답한 외투로 가려진 선정적인 옷이 드러났다.
“넌 환자니까. 쟈파도 중상을 입었으니 걱정이 많겠지.”
“쟈파의 중상이 제겐 큰 충격이긴 하죠. 하지만 상담 치료를 받을 정돈 아니에요. 전 쟈파와 오랫동안 일했죠.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어요.”
앙귀스 레지나는 도도하게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맞은편 자리를 놔두고 하필이면 내 옆이다.
“그러면?”
“제 과거를 정확히 알아야겠어요. 근래, 제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기억의 왜곡을 바로잡을 때죠. 쟈파는 의식이 없는 상태니까,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요.”
난 예전에 보았던 자퍄의 기억 시뮬레이션을 떠올렸다.
‘앙귀스 레지나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만 기억하고 있다. 자세한 정황과 내막은 잊었어. 특히 파올로가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지.’
나는 떨떠름하게 물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뭐가 왜곡이라는 거지?”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자상했어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쟈파를 늘 미워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뭔가 이상해요.”
내가 본 쟈파의 기억은 앙귀스 레지나의 증언과 달랐다.
‘파올로 콴은 내가 본 사람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이코였고,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는 진짜 모녀처럼 사이가 좋았지. 앙귀스 레지나가 파올로를 죽인 까닭도, 사이코 아빠로부터 쟈파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물만 마셨다. 이 사안에 대한 결정은 쟈파가 해야 한다. 이건 내가 끼어들지 못할 타인의 가정사다.
툭.
앙귀스 레지나의 가느다란 손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앙귀스 레지나를 쳐다봤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은 게 아니면, 손 치우고 저 앞에 앉아.”
앙귀스 레지나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 웃음이 울음으로 바뀌었다.
뚝, 뚝.
앙귀스 레지나는 굵직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를 보았다.
“루카, 저는…… 모든 게 무서워요. 진실도, 쟈파도, 세상도, 키누안도. 가끔씩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 들어요. 끝없이 추락하듯 가슴이 계속 철렁거리고요. 미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절망이죠. 정상이 된다는 게 이런 거라면, 차라리 미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앙귀스 레지나의 광기는 도피처이자 자아를 보호하는 가면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앙귀스 레지나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밀어냈다.
“멍청하게 굴지 마. 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너만큼이나 불안정하지.”
“알아요. 그러니까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길다. 빌어먹을 가야 선생은 15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