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내 심장이 통제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난 심장을 손으로 쥐어짜는 상상을 했다. 웃긴 이야기지만, 이런 강렬한 심상은 실제로도 통제에 도움이 된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길다를 관찰했다. 시간은 내 편이다.
길다의 가면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보다 생리현상을 잘 통제할 순 없을 터다. 하물며 길다는 전신의체도 아니었고, 신체 대부분이 자연체 인간이다.
스스스스.
길다의 체취와 분향이 짙어지고 있다. 그녀의 피부에서 땀방울이 밤이슬처럼 맺히고 있었다.
‘길다의 체온이 올라가고 있어.’
긴장과 초조, 불안, 그리고 공포…….
진정하자, 루카.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날뛸 필요는 없다.
길다가 ‘진범’이라면 나와 단둘이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다른 사유가 더 있다.
“길다, 계속 말하세요. 저는 마음의 평온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은 거죠. 그게 불편하고 화가 날지라도요.”
“진실은…… 제가 지젤을 축출하려 했다는 거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요.”
“다른 사업가들처럼요? 죽여서라도요?”
내 말투가 추궁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왜냐면 추궁하는 게 맞으니까.
길다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루카, 제가 지젤을 죽이려 했을 것 같나요?”
“사실은 믿음과 무관하죠. 제가 궁금한 건 당신의 의도와 심성이 아니라 지젤에게 무얼 했느냐입니다.”
믿고 싶은 걸 믿는 게 아니다. 사실이 중요하다. 주관과 감정을 배제한 사실만이 사건을 파헤치는 빛이 된다.
“루카, 저도 아키에스 빅티마라는 걸 알아요.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작은 단서와 거짓말의 흔적만으로도 진실을 건져낸다죠?”
길다는 술잔을 마저 비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스륵.
길다가 옷을 벗고 있었다. 빳빳한 옷자락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녀는 나신으로 내 앞에 섰다.
“전 전신의체도 아니고, 별도의 감정 제어 훈련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술까지 제법 마셨고, 현재 제 정서와 감정은 상당히 불안한 상태죠. 루카가 통찰력을 발휘해 꿰뚫어 보기 좋은 상태일 거예요.”
길다는 태초의 모습으로 서서 그 무엇도 가리지 않았다.
“그간 의심을 많이 받았군요.”
“제가 지젤에게 무슨 짓을 했을 거라고 다들 생각해요. 수군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요. 지금까지 지젤을 잔혹하게 가둬놓았거나, 어쩌면 살해했을 거라 떠들어대죠.”
“그래서 억울했습니까?”
길다의 눈썹이 우울하게 휘었다. 그녀는 소리 내어 자조했다.
“억울할 건 없죠. 실제로, 저는 지젤을 납치하려 했거든요. 지젤이 보더시티에서 아크바란으로 돌아오는 길에요. 더는 지젤의 폭주를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이성을 부여잡았다.
‘납치하려 했었다?’
그 말은 즉, 납치에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합법적으로 경영에서 지젤을 축출하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루카, 어린 말은 하지 마세요. 지젤은 뒷공작에선 저보다 우위에 있어요. 횡령과 배임으로 걸고넘어지면, 지젤 밑에 있는 적당한 지위의 관리자들이 뒤집어쓰고 물러났겠죠. 그렇게 횡령 규모가 알려지면, 지앤지 사이버네틱스는 고스란히 파멸했을 거고요. 당시엔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죠.”
나는 길다의 말을 해체하듯 하나하나 분석했다. 길다는 자신의 감정을 가두지 않고 바깥으로 전부 내뱉었다.
길다의 풍부한 감정이 진정성 있는 언행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내게 고백했다.
“지젤을 죽일 생각까진 없었죠. 그저 몇 달, 길어야 1, 2년만 조용히 연금해둘 생각이었어요. 제가 회사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만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내 머릿속에선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브리엘의 애인과 수양딸이 잔혹하게 죽었다. 이건 키누안과 발렉의 공작이었지.’
길다는…… 지젤을 축출하려 했다. 그러나 길다는 최대한 온건하게 ‘납치’하려 했다. 피를 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선수를 쳐서, 길다의 계획보다 더 빨리 움직였군요. 지젤은 거기에 당한 거고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길다의 나신에서 진실과 안도의 신호가 쏟아졌다.
‘길다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훈련받은 사람조차 ‘기계적인 가면’을 유지할 뿐이지, 감정을 거짓으로 꾸며내긴 힘들다.
“전 지젤의 납치를 준비했기에, 당연히 그 흔적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죠. 유력한 용의자인 절 의심하는 사람들의 추궁과 조사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사라진 지젤을 찾아낼 여력이 없었죠.”
진범은 길다라는 장막을 이용해 자신을 숨겼다. 아주 교묘했다.
‘키누안의 방식.’
이건 키누안이나 할 법한 짓이다. 실제로도 키누안의 입김이 닿았다는 증거가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지젤을?’
키누안이 지젤을 납치할 이유가 있을까? 날 깨우기 위해서라면 지젤을 행방불명 시킬 필요가 있었나? 오히려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난 오랜 기억을 빠르게 더듬었다. 키누안의 그간 언행을 짧은 시간 동안 되돌아봤다.
뭔가가 있다. 실마리가 있었다. 그 한 가닥만 잡아채서 당기면 풀릴 문제였다.
“길다, 옷을…….”
나는 길다에게 옷을 입으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심문하고 추궁하는 건 그만두자.
스륵.
난 조용히 일어서서 길다의 외투를 주워 들었다.
“루카는 절 믿는 건가요?”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길다를 처음 만났을 때, 갱단에게 감금당한 길다는 알몸으로 묶여 있었다.
“진작 믿어야 했죠. 길다가 옷을 벗을 필요가 없게요.”
나는 외투로 그녀의 어깨부터 가렸다. 길다의 눈가가 젖어가더니 눈빛이 일렁였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그 누구에게도요. 제게 납치할 의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더는 그 일을 캐묻거나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길다도 고뇌하며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길다는 회사라는 집단의 수장으로서 행동한 거다. 반면에, 지젤은…… 집단의 수장이 아니라, 내 연인으로서 움직인 거고.’
지젤은 지앤지 사이버네틱스가 몰락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 하나만을 위해 부하와 직원들을 지옥 구렁텅이로 떨어뜨렸겠지.’
솔직히, 사실은,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젤은 오로지 날 위해서만 움직였다.’
이게 굉장히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인간의 감정은 때론 이렇게 추악한 법이다.
지젤이 변했을지라도…… 적어도, 나를 좋아한다는 건 확실했다. 이건 내게 아주 중요한 정보이자 위안이다.
“그 후로, 지앤지 사이버네틱스는 안정됐어요. 지금은 순풍을 타고 있죠. 루카는 지젤을 찾고 있죠? 도움이 필요하다면…….”
길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고, 나는 등을 돌리며 이스마엘의 조언을 떠올렸다.
“……연방 정부가 내민 회사 중에 하나와 합작해서 보더시티에 진출해 주시면 됩니다. 회사의 이익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선에서 연방의 이익을 우선 해주세요.”
“어차피 합작회사를 세울 계획이었어요. 그렇다고 연방 정부의 말을 잘 듣는 회사와 함께할 생각은 없었지만요. 하지만 루카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게요. 저도 루카가 부디 지젤을 찾길 바라니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겁니다.”
옷을 입은 길다가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럼, 이제 가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다. 여러 의미로 말이다.
‘오늘 이후로, 길다를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나는 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선 자리에 앉았다.
“잠깐 정도라면, 회포를 풀 시간이 있겠죠. 다른 사람의 소식도 궁금하고요. 대신, 술이 아니라 물을 마실 겁니다. 술은 충분히 마셨으니까요.”
길다는 화장이 번진 얼굴로 웃었다.
나는 길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르티나 디바나 그레이스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 하층 구역의 가브리엘 갱단원들도 자리를 잡아 하층민 출신치곤 꽤 살고 있었다.
“……전 가브리엘과 길다가 사귀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어요.”
나도 참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군.
“가브리엘은 제 취향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한참이 지나도, 길다는 남자친구를 만들지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요.”
“그야 저는 루카를 좋아했으니까요. 나름 기회를 엿보며 노리고 있었어요.”
나는 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내 눈도 커졌으리라.
“네?”
“루카는 이쪽으론 꽤 둔하다니까요. 본인만 인기가 많은 거 몰랐죠? 주변 여자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혼자서 세상 심각한 표정을 다 지으며 다니는 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요?”
“아니, 뭐. 저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길다도요?”
“제가 조금만 더 눈치가 없었더라면, 루카한테 잔뜩 티를 내며 고백했을걸요.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뭐, 당시의 루카는…… 여러모로 힘들어 보였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아마 그레이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게 연상녀의 배려라는 거죠.”
난 낯짝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기분이 묘하네요.”
“루카는 꽤 잘 생겼어요. 남자다우면서도 여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묘한 분위기도 있고요. 살면서 여자한테 매달려본 적이 없죠? 항상 여자가 먼저 다가왔을 거고요.”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긴 하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길다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아크바란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힘들긴 했으나…… 종종 이렇게 즐거울 때가 있었다.
“혹시 보더시티에서도 여자들이 먼저 추파를 던지지 않았어요?”
저 말도 부정이 힘들다.
“으음…….”
우물쭈물하는 내 태도에 길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로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지젤도 마음고생이 심하겠네요.”
난 표정을 굳혔다. 오해받긴 싫다.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맹세코요.”
그 말에 길다는 더욱 크게 웃었다.
“정말, 웃겨.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바보처럼 외골수인 점이요.”
길다는 웃음 눈물을 훔치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나도 일어날 시간이 됐다는 걸 느꼈다.
“다음에 봐요, 길다.”
길다도 나도 안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루카, 지젤의 행방불명에는 제 과오도 있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절 이용한 거겠죠. 만약…… 최악의 상황에서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하다면 찾아오세요. 지앤지는, 이제 제가 없어져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다져놨으니까요.”
지젤이 죽었다면, 자신을 죽여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서며 길다와 헤어졌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승강기에 들어갔다.
‘결국은 다시 키누안인가.’
나는 목을 매만졌다.
키누안은 ‘파올로의 유산’과 ‘지젤의 정보’를 교환하자고 말해놓고선,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제안 자체가 거짓말이었겠지. 날 떠보는 행동이 필요했던 거다.’
떠본 이유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띵.
승강기가 멈췄다. 아직 옥상이 아니었다. 조작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멈춘 것이다. 누군가 탈 리가 없다.
‘나와 길다의 만남은 연방 정부가 주선하고 통제하는 밀회다.’
나는 승강기의 전자 패널을 보았다.
치직, 지직.
층을 표기하는 패널에선 노이즈가 일었다.
위이이잉.
얕은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열렸다. 조명이 꺼진 복도가 이어졌는데 무척이나 어두웠다.
기잉, 기잉.
기계음이 복도의 어둠에서 울렸다. 붉은 안광이 흐느적거리더니…… 안드로이드 한 기가 나타났다.
‘청소용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는 비전투형이었다. 오류가 생긴 듯이 보행이 어색했고,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논다는 듯이 수시로 휘청거렸다.
‘해킹.’
저 안드로이드는 누군가에게 해킹당한 것이다.
끼이이익.
안드로이드가 멈춰섰다. 서 있는 것조차 실이 끊어지다 만 인형처럼 기괴했다.
-길, 다를, 보호해라. 지금, 당장.
안드로이드가 내게 경고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나도 의문을 표하고 질문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게 길다라면 그럴 시간이 없다. 저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의문과 잡념은 접어두자. 전투태세로 들어갈 때다.
콰직!
나는 제자리에서 뛰며 손을 뻗었다. 내 의수가 천장을 관통하며 튀어 나갔다.
난 손을 더듬어선 승강기와 연결된 케이블을 찾았다.
으드드득! 티- 잉!
난 케이블과 도르래를 잡아당겨 부수며 끊었다. 승강기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어딘가에 걸려 멈췄다.
망설일 시간은 없다.
쾅!
나는 거세게 발을 굴렀다. 충격으로 승강기가 흔들리더니 부품이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내가 발을 더 구르기 전에, 승강기가 낙하했다.
카아아아앙!
……좋아, 이게 가장 빨리 길다에게 돌아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