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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43

243
이스마엘 라는 내게 자유를 허락했다. 허락했다는 표현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어쩔 순 없다.

‘지금은 이스마엘이 내 상관이라고 생각해.’

이스마엘이 연방의 고위층으로부터 나를 지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스마엘은 모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협상과 거래의 여지조차 없어.’

진취적인 관료와 연이 닿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내 도박이 성공한 셈이었다.

난 이스마엘의 말을 떠올렸다.

‘루카 씨, 망명 신청은 사흘 내로 처리가 될 겁니다. 보더시티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연락은 무조건 받으셔야 합니다. 당신이 제 통제에 있다는 걸 증명해야 윗선에서도 납득할 거니까요.’

맞는 말이다. 난 이스마엘이 건넨 목줄을 차야 한다. 최대한 느슨한 목줄을 차는 게 중요하지, 목줄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괜히 목 주변이 답답하군. 심리적 이유겠지.’

난 셔츠의 윗단추를 한 손으로 풀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보더시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레기온과 시험기 MAU의 질주와 전투는 한바탕의 소동으로 여긴 듯이 잠잠해졌다. 연방에서 정보통제를 한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쟈파와 라피스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상류층이 이용하는 병원인지라 무장경비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에퀘시안 용병.’

낯익은 에퀘시안들이 병원 내외부로 배회하고 있었다. 쟈파 상사의 직속 용병대원들이다. 그들은 날 알아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꼴에 같이 싸웠다고, 적대감이 많이 사라졌군.’

난 에퀘시안의 시선이 예전보다 온화해진 걸 느꼈다.

신원 확인을 끝낸 나는 병원으로 들어섰다. 새하얀 복도를 지나서 라피스의 병실을 잠시 들렀다.

삐이, 삐이.

간헐적인 신호음이 났다. 라피스는 여전히 생명보조 장치에 기대서 숨을 쉬고 있었다.

‘범인은 내가 찾는다.’

내 또 다른 목적 중 하나다. 누가 범인이건 간에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해줄 것이다.

라피스는 내가 보더시티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양심이다.

‘이게 세상의 부조리지. 악당들은 버젓이 활보하고, 선인은 불행과 맞닥뜨려야 해.’

세상이 올바르다면,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적이지 않고, 우린 현실적이라는 핑계로 냉소적 시선을 합리화한다.

나 역시,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냉소적인 인격 파탄자.

저벅, 저벅.

라피스의 병실에서 나온 나는 쟈파의 병실로 걸어갔다.

취이익, 취익.

아까보다 거센 호흡기 소리가 들렸다.

쟈파는 배양기에 잠긴 채로 머리만 내민 꼴이었다. 연푸른 액체가 배양기의 가느다란 유리창 너머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전신 재생 치료. 부호다운 치료법이군.’

쟈파를 보니 레기온에게 얻어맞은 엔이 떠올랐다. 엔도 이 병원 어딘가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다. 에퀘시안의 신체 내구성을 생각해보면 죽진 않았겠지.

주륵.

난 눈썹을 살짝 들었다.

쟈파의 머리맡에 달린 온갖 약물팩 중의 하나가 비어가고 있었다. 약물은 고스란히 쟈파의 몸으로 들어갔다.

“카악, 컥, 케엑!”

쟈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그의 몸으로 들어간 약물은 진통제와 각성제였는 듯했다.

“내가 오면 깨어날 수 있게 장치해 둔 건가?”

대단한 정신력이긴 했다. 중간중간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내린 명령이겠지.

“아, 잠시, 의식이, 혼잡하네요, 호욧, 호욧.”

쟈파는 연거푸 숨을 골랐다. 그의 입에 걸려 있던 호흡기는 자동으로 턱까지 내려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쟈파가 현실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쟈파의 불안정한 동공은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했다.

“쉬이이이, 쉬이이이…….”

호흡을 고른 쟈파가 나를 응시했다.

“이번 건은 나를 노린 공격이었다.”

“호욧,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쟈파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나도 네게 미안한 마음은 없어. 너는 제국이 나를 노린다는 걸 알면서도 고용했잖아. 언젠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지.”

“하지만 이 정도로 과감하게 루카 씨를 노릴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은 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군요.”

중요한 것도 있지만, ‘집착’하는 것도 있다. 이반 크라치아는 간혹 내게 묘한 집착을 드러냈었다.

‘내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게 낫지.’

나는 굳이 쟈파의 추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현재, 나는 망명 절차를 밟고 있다.”

“그게 목적이었군요. 저를 통해 연방 관료와 접촉하셔도 됐을 일입니다.”

쟈파는 중상에서 강제로 각성했음에도 판단력과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나란 인간의 지분을 여러 사람이 나눠 가지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 그래야 누군가에게 종속되지도 않고, 내 발언권도 높아지지.”

“호요오오……. 루카 씨를 품기엔 제 그릇이 부족하긴 하죠. 근래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쟈파는 다소 낙담한 듯했다.

“키누안 추적은 계속하고 있어. 그 일은 내 안에서 우선순위가 상당히 높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쟈파가 자조하듯 웃었다.

“이젠 믿을 수밖에 없죠. 당신은 제 통제에서 벗어났으니까요.”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야. 이스마엘 차관이나 연방의 관료가 오면 적당히 입을 맞춰. 여전히 네 도움이 필요하다, 쟈파.”

나와 쟈파는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조율했다. 쟈파라면 알아서 처신할 것이다.

“……전 이제 당신에게 숨기는 게 없습니다. 모든 걸 내놓았죠.”

“알아.”

나는 쟈파의 고뇌와 결단을 똑똑히 보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더 없었다. 쟈파도 각성한 동안 회사의 상황을 보고받고 방침을 정해야 할 것이다.

“쟈파, 난 지젤 쿠스토리아를 찾고 있다.”

“그 정돈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그 이유도?”

쟈파가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호욧.”

* * *

망명 처리까진 이틀이 남았고, 내 휴식을 방해하듯 단말기가 울렸다.

-루카 씨, 오 대리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난 손석재의 연락을 받자마자 움직였다.

오 대리는 라피스의 공중차량이 폭발하자마자 종적을 감춘 사람이고, 라피스와 사사건건 대립하기도 했었다.

‘유력한 용의자지.’

하지만 오 대리가 범인일 것 같진 않았다. 그 이상의 배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누가?’

처음에는 손석재를 의심했으나 그는 아니었다. 손수공업과 나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려는 쟈파의 자작극?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키누안?’

키누안과 라피스는 접점이 너무나 없었다. 키누안은 뜬금없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무의미한 살육이나 고통을 만들어내진 않는다.

라피스를 상해해서 키누안이 무얼 얻는단 말인가? 나의 의심? 고통?

그간의 키누안의 행적과는 결이 묘하게 다르다.

‘배후는 누구지?’

일단은 오 대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기껏해야 일반인이다. 놈에게서 진실을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아.’

나는 보더시티의 대로로 걸어갔다.

끼이익.

새카만 승용차가 내 앞에 섰고, 문이 위로 열렸다.

운전석에는 손수공업의 직원이 있었고, 뒷좌석에는 손석재가 평소보다 매서운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타시죠. 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군말 없이 손석재 옆에 탔다.

“오 대리는 어디에 있지?”

“질이 낮은 유흥가입니다. 사실 쫓기는 사람이 갈만한 곳은 거기서 거기죠. 지금 직원들이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곧 연락이 올 겁니다. 동네만 알면 찾는 건 금방이죠.”

손석재는 그리 말하면서 시가 상자를 매만지면서 두드리길 반복했다. 어지간히도 흡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 대 피워. 그래도 나보다 연장자인데 너무 눈치를 보면 안 되지.”

“뭐,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오 대리 말입니다만…….”

“곧 시체가 될 사람이지.”

손석재가 시가에 불을 붙이고선 연기를 빨아당겼다. 그의 회색 머리와 연기가 뒤섞였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군요. 오 대리와 만나면, 적어도 사실관계는 정확하게 확인합시다. 그 뒤에 처우를 정하죠.”

“부하 직원을 꽤 아끼는군.”

“그러니 다들 절 따라오는 거죠. 오 대리는 제 부하 중에서도 특히 성실합니다. 주말이면 봉사활동도 나가죠. 그런 오 대리가 폭탄을 설치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한마디로, 오 대리는 입은 험해도 좋은 녀석이거든요. 분명히 사연이 있을 겁니다.”

손석재가 날 타이르듯 말했다. 그는 자욱한 연기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다짜고짜 놈을 쥐어패거나 죽이진 않을 거다. 누구보다 진범인 궁금한 건 나니까. 놈의 단독 범행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하, 좋습니다. 우리의 신뢰가 더욱 깊어가는 것 같군요. 그거 아십니까? 루카 씨를 만나고 나서 제 일이 술술 풀리고 있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따로 없죠.”

표현이 뭔가 거슬리지만 넘어가자.

도로가 좁아지고 있었다. 더는 차량으로 진입이 힘든 거리가 보였다.

“차량 잘 지키게.”

손석재와 나는 운전자만 놔둔 채로 차에서 내렸다.

골목길로 들어가니 마중 나온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외투와 같은 일상복 아래로 가벼운 방탄복을 입었고, 허리춤에는 권총이나 나이프 따위가 걸려 있었다.

“사장님, 오 대리를 찾았습니다. 어제부터 저쪽 건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직원 하나가 손석재에게 보고했다.

“나와 루카 씨만 들어가면 돼. 나머진 근방을 통제하도록.”

손석재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손수공업의 직원들은 폐건물 하나를 포위하고선 통제했다.

‘다들 이런 일에 익숙하군.’

하는 행동만 보면 갱단원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손석재와 단둘이서 건물로 들어갔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공동주택이었다. 깨진 유리창과 반쯤 허물어진 벽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조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카 씨, 아까 나눈 말들을 기억해 주십쇼.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입니다.”

손석재가 계단을 오르며 당부했다.

우린 오 대리가 머문다는 방 앞에 도착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내 감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듯 확장됐다. 문 너머에 있는 온갖 정보가 감각 줄기를 타고선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직관은 투시하듯 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하아, 염병.’

난 한숨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삼켰다.

덜컹.

손석재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손석재의 얼굴 앞으로 손바닥을 뻗었다.

타- 앙!

총성이 울렸다.

치이이이!

총알이 내 손바닥에 처박힌 채로 멈췄다. 내가 막지 않았다면 손석재의 얼굴이 뚫렸을 것이다.

깡.

내 손바닥에 막힌 탄두가 바닥에 떨어졌다.

“오 대리?”

손석재가 내 손바닥 옆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방금 죽을 뻔했는데도 동요가 크진 않았다. 어지간한 변수가 생겨도 내가 지켜주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그걸 감안해도 배짱이 대단했다.

우린 방안의 풍경을 보았다. 폐건물인지라 내부는 당연히 황량했다.

‘오 대리.’

난 오 대리를 보았다. 그는 나이프와 권총을 쥔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타르파의 시신.’

침대에는 타르파의 시체가 있었다. 야릇한 복장을 보아하니 타르파 종족의 창부였다.

‘목을 졸라 죽인 건가? 끔찍하군.’

민간인이 맨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졸라 죽이는 건 쉽지 않다. 굉장한 감정적 증오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잠, 잠깐, 오 대리. 왜, 나한테 총을 쏜 건가. 진정하게.”

오 대리는 눈물 콧물 다 빼며 손석재를 노려봤다.

“사, 사장님, 약, 약속했잖아요. 외, 외계 종족을, 마, 마음껏, 증오하게 해, 해준다고요. 그, 그런데, 타르파, 타르파를, 감, 감싸요?”

“아니, 이 사람아. 언제 적 이야기를…….”

“닥, 닥쳐!”

오 대리가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서 총알을 막았다.

……아무래도 나와 손석재는 소시민의 악의를 우습게 여긴 모양이다. 이래서 세상은 혼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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