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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40

240
엔은 그림자 레기온 한 기를 격파하고 전투 불능에 빠졌다.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 같았다. 물론, 큰 도움이 되긴 했지. 하지만 평소에 놈은 내게 입을 턴 게 있으니 이 정돈 당연히 해야 한다.

어쨌든 엔이 당함으로써, 전력의 천칭이 눈에 띄게 기울었다.

내가 어떻게든 외눈의 레기온을 상대하더라도, 나머지 한 기를 막기엔 에퀘시안 용병의 전력이 부족했다. 엔을 잃은 직후부터 무의미하게 당하기만 했다.

에퀘시안 용병이 무능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열세에서도 용맹하게 잘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퀘시안 용병들은 레기온 상대법을 전혀 몰라. 전갑의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

하물며 레기온은 전갑의체 중에서도 최상위 사양의 기체다.

키잉!

외눈의 레기온이 내 다리를 번번이 노리며 창을 휘둘렀다.

끼릭!

놈의 허벅지 장갑이 열리면서 권총이 치솟았다.

레기온은 잽싸게 떠오른 권총을 잡아채더니 내 다리를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라피스의 실력을 믿어.’

나는 다리를 끌어올리며 탄도를 계산했다. 레기온의 권총은 대구경 화력이다. 정면으로 대응했다간 팔다리가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각도만 잘 조절한다면 총알이 빗겨나갈 것이다. 내 의체 표면은 도탄 처리를 위한 곡면을 가지고 있었다.

총탄과 내 정강이가 충돌했다.

키이이잇!

끔찍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은 튕겨 나가듯 비틀렸다. 그러나 총탄도 내 정강이 외피만 긁으며 비껴갔다.

‘할만하다.’

오히려 ‘그림자 레기온’은 ‘그림자 전투의체’보다 행동을 읽긴 편했다.

‘그림자 전투의체처럼 변칙적인 사양은 없어. 팔이 360도로 회전하거나 그런 기능은 없다. 자질구레한 기능이 많아질수록 내구성은 떨어지는 법이니까.’

레기온이 아무리 고성능이라도 덩치가 클수록 ‘본연의 내구성’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잦다.

하지만 어렵고 불리한 상황이라는 건 여전했다.

‘놈들은 기계적으로 정확하다. 아무리 우수한 군인이라도 감정적 사고가 끼어들면서 행동의 잡음을 만들지만, 이들에겐 그런 잡음조차 없어.’

그림자들은 충실하고도 충실한 전투 기계였다. 나 따위가 전투 기계라고 자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분석해도 열세다.’

열세를 뒤집으려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판단이 더 늦어서도 안 된다. 에퀘시안이 모두 당하면 마지막 방도조차 사라진다.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나는 뒤로 물러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체의 팔다리를 선명하게 인지했다.

‘죽기 싫으면 한계까지 집중력을 토해내. 뒷일을 생각하며 아낄 건 없어.’

죽음의 위험 앞에서 ‘부작용’과 ‘고장 확률’을 고려치 않고 능력을 짜낼 수 있다.

기이이잉.

좋아, 익숙한 고속 지각 상태가 약물처럼 내 정수리까지 치밀었다.

사고는 가속하고, 세상은 느려진다.

늘어진 소리는 해상력이 높아져 잡음조차 분간 가능할 정도다. 섬세한 시각은 금속판의 흠집 개수까지 셀 수 있었고, 민감한 후각 덕분에 적이 숨겨둔 무기의 속성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인지의 확장과 가속.

머릿속이 뻐근하다. 뇌가 수축해서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버텨라.’

내게 남은 한계 돌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반복할수록 재기불능 확률이 점점 올라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파산하는 도박을 하는 셈이다.

콰- 아아앙!

폭음이 일었다.

내 눈은 외눈의 레기온이 아니라 외벽으로 쏠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가 외벽을 보고 있었다.

내 시지각에선 외벽이 폭발로 바스러지는 게 느릿하게 보였다.

‘또 폭발이냐! 염병!’

외벽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발은 크지 않았다. 외벽만 부서질 정도였다.

콰드드득!

부서지는 외벽에서는 중장비처럼 큼직하고 투박한 팔과 손이 튀어나왔다.

난 팔과 얼핏 드러난 본체의 외형을 보고선 그 정체를 알아챘다.

‘손수공업의 시험기 MAU?’

손수공업의 시험기가 사옥에 매달려 있었다. 내부로 진입하기엔 시험기 MAU의 덩치가 너무 컸다.

기잉, 철컥.

시험기의 팔뚝 상부가 열리면서 내장형 기관포가 튀어나왔다. 전차나 다름없는 기갑병기이기에 가능한 장비였다.

키릭!

기관포는 외눈의 레기온을 노리고 있었다. 곧 묵직한 총알이 빗발쳤다.

투두두두두!

경박할 정도로 화려한 총성이 일면서 외눈의 레기온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림자 레기온도 당연히 이 정도 화력에 당하지 않았다. 총알에 맞을 때마다 장갑이 푸르스름하게 빛났고, 에너지 코팅이 다 된 장갑조차 살짝 파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저지력은 충분하다.’

시험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쪽으로,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잡음이 섞여 있지만, 난 그 목소리가 야나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연방의 MAU 공식 파일럿이다.

야나카는 아직 미성년자인데도 실전에 투입됐다. 뭐, 별 건 아니긴 하지. 나도 저 나이에 사람을 수없이 죽이면서 실전 임무를 수행했다.

‘일단 내겐 다른 방도가 없다. 망설일 시간도 없고.’

기관포의 총알이 떨어지면 외눈의 레기온이 바짝 따라붙을 것이다.

나는 야나카의 시험기를 향해 뛰었다.

기이잉!

에퀘시안 용병들과 싸우던 레기온조차 급격히 상체를 비틀어 나를 바라보더니 달려오고 있었다. 놈은 에퀘시안의 공격은 무시했다.

타- 앙!

레기온은 내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사격까지 했다. 놓치는 것보다 위험을 다소 감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찔하군.’

나는 미끄러지듯 잔해를 넘어가며 힘껏 뛰었다.

투웅!

내 발밑이 부서지면서 깨졌다. 너무 출력을 높인 탓에 이대로는 시험기를 지나치며 사옥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

내 의체가 아무리 잘났어도 활공 기능은 없고 제트팩은 더더욱 없다. 허공에 뜬 채로 추락하면 뒈진다는 뜻이지.

카앙!

그러나 시험기가 외벽을 잡은 손을 놓더니 나와 같이 뛰어내렸다.

스륵!

시험기는 두 손을 뻗어서 나를 포개듯 감쌌다.

나도 시험기의 손가락을 붙잡으며 바깥으로 나아가던 몸에 제동을 걸었다. 내 몸이 덜컹거렸다.

쿠우우웅!

시험기와 나는 사옥 아래로 떨어졌다. 저 위로는 시험기를 운반한 운송 헬기가 보였다.

-일단 도주한다. 곧 승인이 떨어질 거야.

시험기에서 야나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인?”

-자세한 건 차관님과 이야기해. 보안 내선으로 연결해 주지.

시험기는 쟈파 상사의 사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기를 쫓아 레기온들이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놈들은 에퀘시안 용병들을 떨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다.

‘거리를 벌렸어도 복합적인 기동성은 레기온이 우위다.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그러나 MAU 시험기는 걸어 다니는 중전차였다. 기동성 대신에 화력을 갖췄다.

기잉, 기이잉.

시험기의 등이 열리면서 포탑이 나왔다. 기관포와 달리 정교한 단발 사격용이었다.

포탑은 별도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따라오는 레기온을 저격했다.

터- 엉!

레기온이 팔을 휘둘러 포탑의 사격을 튕겨냈다. 포격이 엉뚱한 곳으로 튀면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씨, 이스마엘 라입니다.

시험기의 손바닥 일부가 열리면서 통신기가 드러났다. 거기서 이스마엘 차관의 목소리가 나왔다.

“급박하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지금 상황부터 설명해 주시죠.”

-제국에서 탈영병 체포를 위해 보더시티에서 대외적 군사 작전을 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통보 직후, 바로 사태가 벌어졌으니 사실상 통보를 하기도 전에 움직인 셈이죠. 사소한 외교적 마찰 정돈 무시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건 삼국협약에 따른 보더시티의 특수성도 있습니다.

제국이 지칭한 탈영병이란 나였다. 제국은 내 소식을 접하자마자 과감하게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반 크라치아가 움직인 셈이지.’

이스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통신기 너머로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스마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느라 여러 부서에 공문을 보냈을 것이고, 실시간으로 보고를 주고받는 중인 듯했다.

-제 소속은 전략무기연구부인지라 제 권한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없습니다. 군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제시간 안에는 무리겠죠. 뭐,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은 관료 사회와 민주주의의 맹점인 셈입니다.

이스마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당장 그쪽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연구부 휘하의 직속 파일럿이고, 손수공업에게 실험기 요청했겠군요.”

-역시 우수하시군요.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손 사장도 시험기 투입을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이걸로 시험기의 실전 성과도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손 사장은 모험을 좋아하죠. 흔들다리를 건너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야나카와 시험기로 제국의 레기온과 대적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제원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전투의 경험치와 판단력의 차이가 아주 많이 날 겁니다. 저들은 괴물이죠. 시험기와 조금만 싸워봐도 약점을 파악하고 박살 낼 겁니다. 이대로 도주하는 것이 최선이죠.”

-조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동의하긴 어렵군요. 어쨌든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국에선 당신의 소재를 알자마자 추격하고 있고…… 당신에 대한 다른 망명자들의 증언도 기록으로 받아냈습니다. 정황상, 저는 당신의 중요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연방에선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신의 망명 요청을 받아들이겠죠.

“그 의사결정이 빨라야 할 겁니다. 레기온이 따라붙고 있으니까요.”

나도 슬슬 조급했다.

-원래라면 며칠은 더 걸리겠지만, 긴급 사안으로 결재를 올렸습니다. 망명이 아니라 임시 보호조치 정도라면 15분 안에 나올 겁니다.

15분? 1분 1초가 긴급한 상황에서 15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15분이 아니라 5분도 깁니다!”

결국, 나는 짜증을 내고 말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제국이 이토록 과감하게 행동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제국은 황제의 말 한마디와 결단으로도 많은 게 움직인다. 연방은 체제의 안정성을 갖춘 대신에……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잃었다.

기이이이잉!

시험기는 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발에 달린 바퀴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레기온은 지름길로 오고 있다.’

시험기는 큰 도로로만 움직일 수 있다. 갈 길이 뻔하다는 소리였다. 반면에 레기온은 복잡한 지형지물을 손쉽게 돌파했다.

레기온은 사람에 비하면 거인이고 육중한 기체였으나, 시험기 MAU에 비하면 한없이 민첩했다.

-그럼, 잠시 뒤에 좋은 소식으로.

이스마엘도 상당히 바쁜지 연락을 바로 끊었다. 그도 지금 상황이 답답할 것이다.

치직.

잡음이 일면서 회선이 바뀌었다. 이번엔 야나카가 말을 걸었다.

-전투용 MAU는 레기온보다 화력과 성능에서 앞서. 날 우습게 보지 마. 공터에 도착하면 놈들을 요격할 거야.

시험기가 레기온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에 발끈한 모양이었다.

난 시험기의 조종석 방향을 돌아봤다.

“병신 같은 소리 하지 마.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 실전은? 얼마나 경험했지?”

어린애의 객기는 끔찍하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에퀘시안과 당신도 레기온을 저지했잖아. 내가 조종하는 건…… 연방의 결전병기야.

“최종병기? 웃기지 마. 그저 불안정한 시험기지. 나와 에퀘시안 용병들을 너와 동급으로 놓지도 마라. 너와는 넘어온 사선의 길이와 숫자가 달라.”

야나카는 철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난 야나카의 조종석 해치를 뜯어내고선 그녀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이대로 도주로를 길게 나아가. 교전은 피해라.”

-넌 내 상관이 아니야. 상부에선 내 판단에 당신의 구출을 맡겼고.

야나카는 시험기를 조종해 땅만 평탄화된 부지에 도착했다. 개발을 앞둔 지역이었다.

“이 멍청이가…….”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누가 멍청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 아니면 내가 시간을 벌 테니까, 도망가. 그 편이 낫겠네.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너 정돈 레기온 한 대로 저지당할 거다. 어차피 나도 레기온과 싸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

묵색의 레기온이 건물 사이를 빠져나오더니 공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핫, 시작해 보자고. 제국과 연방의 결전병기끼리.

야나카가 생기발랄한 호승심을 드러냈다. 이런 면은 호감이긴 하지만…… 이 꼬맹이는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만약, 여기서 살아남으면 넌 나한테 이빨이 다 털릴 줄 알아라.”

어린 나이에 틀니를 끼게 만들어줄 테다. 맹세컨대, 농담이 아닌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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