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나는 손수공업과 협상으로 연방의 고위 관료와 접촉했다.
‘남은 건 연방 정부, 아니, 이스마엘 차관의 판단과 선택이겠지.’
나도 뒤늦게 연방의 관료조직 구조와 차관직을 조사했다.
‘차관은 그 부서의 핵심적인 실무진이다. 그보다 윗선은 상징적인 의미가 커. 실무적 문제는 차관이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이스마엘이 내 망명의 군사적 가치를 어디까지 쳐줄지는 의문이다. 내가 원하는 가치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추가적 협상이 필요할 터다.
‘망명 협상에서 내가 꺼낼 무기는 많다. 그간은 내 안의 거부감 때문에 망명을 택하지 못한 거지.’
나는 곧 죽어도 제국 출신이고, 세뇌에 가까운 충성 교육을 받았다. 황실에 대한 거부감이 생긴 지금에 이르러서도 제국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연방의 보호를 받는다면 이반도 당장 손을 쓰지 못할 거야.’
제국과 이반의 귀에 내 소식이 들어가기 전에 망명 처리가 끝나야 한다.
‘지젤을 찾을 때까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는 사옥의 방에 앉아있었다. 동공만 움직이며 내 손을 보았다.
위이이잉.
내 손과 팔 주변에서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날벌레는 불규칙한 궤적을 중첩하듯 그리며 주위를 떠돌았다.
‘오랜 진화의 결과겠지. 저런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다니면 예측이 힘들고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불규칙한 궤적을 통찰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혼란의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끼릭.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날벌레를 잡아챘다. 낚아채는 순간은 극도로 섬세했다.
난 의수의 세공된 손톱으로 날벌레가 다치지 않게 압력을 조절했다.
위잉, 위잉.
손톱 사이에 낀 날벌레가 덧없이 날개를 움직였다.
‘내 뇌 기능은 아직 괜찮다.’
물론, 이건 정밀한 검사가 아닌 자가진단이다. 내가 이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다.
‘극한 상황에서 가끔 뇌가 과작동하면서 나도 놀랄 정도의 고기능이 나오기도 해.’
내 능력의 고점 자체는 생도 시절보다 지금이 더 높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뇌의 회복력과 내구성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야. 극단까지 치달으면 한계가 금방 오고 회복이 늦다.’
머릿속에 시한폭탄을 넣어두고 다니는 것 같았다.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전에 지젤을 찾아야 한다.
‘한정된 시간, 부족한 능력,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들.’
나는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포기해야 하는가?
라그나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선택과 집중을 강조했다.
‘우린 모든 걸 가질 수 없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걸 버리려 했다. 나 자신의 유약한 면과 약점들을 말이다. 때론 버렸다고 생각했다.
난 거칠고 공격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다. 자비심과 동정심도 없는…… 사납고도 이기적인 부류의 인간.
주변인들도 날 그렇게 보길 원했다. 그러면 애초에 내게 부탁도 하지 않을 거고, 인간적인 교류도 하지 않을 터다.
고독할수록 난 강해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폭풍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정작 폭풍기에서 날 구해준 건 고독한 강함이 아니라 유약한 면으로 인해 생긴 유대였다.
‘그 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내 안에서 타협점을 찾아라.’
지금도 어디까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할지에 대한 정답을 모르겠다. 세상은 혼란과 혼돈으로 그득하다.
사람은 본디 믿을 수가 없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유약하고 변덕스럽다. 그러나 살아가려면 그 불안감을 가지고도 타인을 믿어야 한다.
저벅, 저벅.
난 위태로운 자각을 가진 채로 사옥의 복도를 걸었다.
‘……여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그러나, 나는 신경 쓰고 있었다.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나 자신이 절벽에 떨어지기 직전인데 타인을 돕겠답시고 손을 뻗고 있는 셈이었다.
‘둘 다 절벽에 떨어지기 딱 좋은 판단이지.’
나는 보얀의 방 앞에 섰다.
난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두웠고 바삐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얀, 나다.”
내가 어두운 방을 보며 말했다.
침대 쪽에서 보얀의 샛노란 동공이 뾰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락없는 야수의 모습이었다.
“루, 루카 씨? 갑, 갑자기?”
보얀은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그래도 명색에 후견인이자 보호자니까. 찾아올 수도 있지.”
내 시야가 어둠에 적응했다.
보얀은 이불을 외투처럼 걸치고선 침대에 앉아있었다. 과하게 추위를 느끼는 듯했다.
‘빌어먹을…….’
난 단박에 보얀의 중독 증세를 알아챘다. 약물 중독자가 흔히 보이는 감각 과잉과 혼란이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내 예상보다 중독 증상이 훨씬 빨랐다. 애초에 난 인간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다.
“손님이 왔는데 마실 거라고 내어와야지. 거기 처박혀 있는 게 아니고.”
보얀은 침대에서 나오려고 하다가 머뭇거렸다.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지랄.”
내가 의자를 밀 듯이 걷어찼다. 의자가 벽에 부딪히며 거친 소리가 퍼졌다.
“카륵!”
놀란 보얀의 동공이 더 가늘어졌다. 이내 그의 성대에서 야성의 상징이 흘러나왔다. 감춰둔 손톱도 드러나며 이불을 파고들었다.
“그래, 애초에 넌 전사 종족이야. 어쭙잖게 책상머리에 앉으려고 하니, 이 모양 이 꼴이지. 널 쥐어팬 레고르의 심정이 백번 천번 이해가 되는군.”
“여, 여태 저, 저를, 응, 응원하고 지지하셨잖아요.”
난 보얀의 책상 위에 앉았다. 그리고 팔을 뻗어서 창문을 가리는 커튼을 잡아당겨 찢었다.
쿠당탕!
커튼 봉도 같이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경쾌한 햇빛이 방안을 스며들었다.
“크르르륵!”
보얀은 온몸을 곤두세우며 더 구석으로 도망가며 빛을 피했다.
‘광과민 반응. 원래 고양잇과 종족이니 더 심하겠지.’
짜증이 난다. 자신의 의지로 한 선택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꼬락서니라니…….
“내가 널 지지한 건, 네게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막상 경쟁에 들어가니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자빠졌잖아. 힘들 줄 모르고 시작한 거야?”
“이, 이렇게 어렵고, 힘, 힘들 줄은 몰랐어요. 격, 격차가 이렇게 날 줄은 몰랐다고요.”
“장난해? 어려운 게 당연하잖아. 그렇게 쉬웠으면 너희 종족에서도 학자나 관료가 쏟아졌겠지. 대신, 넌 남들보다 쉽게 강한 전사가 될 수 있지. 지금부터 제대로 된 훈련을 2, 3년만 받아도, 인간 종족으로 이뤄진 분대 정돈 혼자서 우습게 해치울 수 있을 거다. 레고르도 우수한 전사였고, 너는 머리도 좋지. 넌 크롤러 중에서도 좋은 혈통을 타고났어.”
보얀의 부친인 레고르도 전투나 사냥 같은 방면으로는 굉장히 명석한 크롤러였을 것이다.
‘애초에 레고르가 멍청했다면, 짐 덩어리인 보얀을 데리고 살아남지 못했겠지. 자기만의 고집까지 부리면서 말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불을 뒤집어쓴 보얀을 끌어내서 두들겨 패고 싶었다.
‘보얀은 폭력에 굴해 생각을 바꿀 놈이 아니야. 폭력으로 바뀔 거면, 레고르 밑에서 진작 바뀌었겠지.’
난 뾰족한 필기구를 잡아서 보얀에게 던졌다.
휘릭!
보얀이 잽싸게 위험을 감지하더니 몸을 옆으로 빼면서 필기구를 잡아챘다.
“좋은 움직임이다. 넌 전사로서의 재능이 풍부해. 묵히기 아까울 정도지. 네 인생을 약물 중독으로 끝내지 마라. 병원에서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지?”
“병, 병원에서 주는 것만으로는 제가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어요. 곧 다, 다른 곳에서 구해야 했죠.”
“이건 정해진 결과야. 중독에 이른 너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겠지. 내 생각보다도 증상이 빨리 진행됐어. 약속한 대로 격리병동에 처박혀서 치료나 받아. 그 이후엔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으마. 일자리가 필요하면 쟈파에게 말해두지. 쟈파는 네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어. 내가 없더라도 챙겨줄 거야.”
보얀이 두건처럼 두른 이불을 젖히더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학, 학교엔 꼬박꼬박 나가고 있어요! 시, 시험 결과도 좋, 좋아요.”
보얀이 자신의 단말기를 조작하더니 화면을 띄운 채로 내게 던졌다.
척.
난 단말기를 받아 채고선 보얀의 성적표를 확인했다.
‘……이건 좀 놀랍군.’
가시적으로 보얀의 성적이 오르고 있었다. 밑바닥이었던 성적이 상위권에서 놀고 있었다. 편입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했다.
“저, 저도 깨달았어요. 전, 전 공부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어요. 공부, 공부를 통해 뭔가를 바, 바꾸고 싶었죠.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 공부가 필요했던 거죠. 제, 제 본능은 피와 살점을 원해요. 요, 요즘은 날고기가 먹고 싶어서 바깥에서 사, 사 먹기도 해요. 예전엔 야만적이라며 그렇게 싫어했는데 말이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보얀은 금단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처음에는 약물을 구하지 못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력으로 약물을 끊고 통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약물은 투여하지 않았지?”
“시험이 끝난 직후부터 지금까지요. 이렇게 틀어박혀 있다 보면 좀 나아져요.”
“금단 증세에 시달린다고 학교를 빠질 순 없잖아.”
“……학교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참아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다른 일은 못 하고 있어요. 수업은 몰래 촬영해 뒀다가 몸 상태가 좋아지면 몰아서 보고요.”
사실, 난 보얀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녀석의 집중력과 의지력이 머지않아 바닥날 거라 생각했다.
‘녀석은 목적을 위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 몸이 부서지기 전에 목적을 이루거나, 그 전에 파멸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설사 천운이 따라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보얀의 몸이 재기불능 수준으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그래, 보얀에게 처음 이끌린 이유도 이 때문이었지.
‘나와 비슷하다.’
나는 책상에서 내려오며 밀었던 의자를 당겼다.
스륵.
내가 자세를 고치며 의자에 앉았다.
보얀도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여자애, 이름이, 그래, 야나카, 그 여자애가 널 걱정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교류할 가치가 있는 녀석이야. 널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더군.”
“야, 야나카를 만났어요? 어, 어디서요? 그 애는 요즘 학, 학교를 나오지 않아요. 제 몸, 몸은 모임엔 나갈 상태가 아니었고요.”
보얀이 구석에서 조금씩 기어 나왔다.
“어디서 봤는지는 네가 알 것 없어. 내 일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난 여전히 네가 자력으로 약물과 중독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아. 벌써 이 지경에 이른 걸 보니 더욱 생각이 확고해졌지. 내 판단으론 더 늦기 전에 격리병동에서 치료를 받는 게 맞다.”
보얀이 황급히 입을 움직였다.
“하, 하지만 루, 루카 씨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지금 네 꼬락서니를 보고도, 나는 널 격리병동으로 보내지 않을 거다. 분명히 나중에 폐인이 된 너를 보며 내 선택을 후회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격리병동으로 보내더라도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다. 네 가능성을 내 얄팍한 잣대만으로 무시하는 셈이니까. 만에 하나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나와 보얀은 그 만에 하나를 뚫고 나온 존재다. 그러니 이레귤러지.
난 결정을 내리며 일어섰다.
보얀은 떨림이 잦아든 얼굴과 명료해진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금단 증상이 멎은 듯했다.
“루카 씨는 자식을 낳으면 좋은 아버지가 될 것 같아요.”
“하, 하, 하. 좋은 아버지? 농담이 웃겨서 기가 막히네. 판단력이 벌써 흐려진 거냐?”
난 비웃음을 던지며 방을 나가려 했다.
“가기 전에…… 제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주세요.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됐어요. 교육으로 지식이 넓어진 덕분이죠.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내겐 낭비할 시간이 없다. 하지만 이걸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자.
난 자리에 앉으며 보얀을 위한 시간을 내었다. 보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낭비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