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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쟈파와 제법 오래 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쟈파의 에퀘시안 용병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연스레 알게 됐다.
다른 에퀘시안 용병대가 같은 구조인지는 나도 모른다. 적어도 쟈파가 고용한 에퀘시안 용병대는 용병대장과 대전사로 나뉘어 있었다.
고용주와의 협상과 전투 지휘는 용병대장이 맡는다. 용병도 엄연한 사업이다. 용병대장에게 중요한 건 냉엄한 판단력과 차가운 지성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업화된 용병대라지만 용병대는 엄연히 전사 집단. 개인의 무력은 여전히 중요하며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용병대장이 부하보다 약하다면 위계를 바로 세우기 힘들다.
대전사는 용병대장을 대신해 무력을 상징했다. 가장 뛰어난 전사가 용병대장을 존중하는 형식으로 질서를 세웠다.
사실상 두 명의 수장이 용병대의 균형을 유지하는 셈이었다.
‘비슷한 전투 종족이라도 에퀘시안과 크롤러는 다르다. 에퀘시안은 정치적 능력과 협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무력을 상징하는 대전사 엔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우득.
엔은 서재 입구를 틀어막듯 서 있었다. 그가 문틀을 짚으니 손자국이 짙게 남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엔을 응시했다.
“대응이 빠르군. 역시가 역시인 거겠지.”
내가 서재 중앙에 선 채로 말했다.
-여긴 쟈파의 개인공간이다. 네가 들어올 곳이 아니지.
“무단침입은 아니야. 엄밀히 말하자면 앙귀스 레지나의 집이 아닌가? 그쪽의 허가를 받고 들어온 거다.”
-허가받았다는 놈이 창문을 깨고 들어오나?
이건 할 말이 없다. 난 목덜미를 주무르듯 매만졌다.
“키누안을 찾으려면 놈의 근본적인 목적을 파악해야 해. 사소한 단서도 놓쳐선 안 되지.”
-여긴 단서가 없어. 넌 하던 대로 사냥감을 쫓기만 하면 된다.
“단서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보고 판단할 일이지.”
지금은 쟈파와 통신해서 중재해야 하는 상황이다. 굳이 무력 충돌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 기회에 엔의 역량을 파악하고 싶었다.
‘쟈파와 갈등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나는 엔과 싸워야 한다.’
엔의 전투 헬멧에서 안광이 샛노랗게 빛났다. 덩치도 나보다 크다. 보통 인간이라면 마주하자마자 위압감에 짓눌릴 것이다.
‘내가 에퀘시안과 마주할 수 있는 건 강화를 거친 인간이라서 그런 거다.’
종의 타고난 전투력으로 따지면 에퀘시안이 인간을 압도한다.
-때가 왔다는 듯이 구는군. 네 불온한 시선을 늘 느끼고 있었다.
“입담만큼 네게 실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거든.”
-거짓말은 관둬. 쟈파와 충돌을 대비해서 나와 탐색전을 하고 싶은 거겠지. 그러니 충돌은 거절한다.
엔이 단말기를 탁자에 올렸다. 난 눈을 찌푸렸다. 기껏 끌어올렸던 열기가 몸에서 싹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위이잉.
쟈파의 실시간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올랐다. 홀로그램 해상도가 낮아서 쟈파의 표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호욧, 호욧, 호욧…… 이거, 참, 당혹스럽군요, 루카 씨. 이 장소는 앙귀스 레지나에게 들은 겁니까? 그 아이가 당신을 선택했군요.
“키누안을 찾고 싶으면 내게 정보를 개방해. 이렇게 하나하나 숨겼다간 일이 꼬일 뿐이야.”
-제겐 키누안을 찾는 일만큼이나 앙귀스 레지나의 안녕도 중요합니다.
“……정말로 앙귀스 레지나가 존속 살해를 저질렀나 보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저도 처음에는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연인마저 허망하게 잃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이가 남긴 유일한 피붙이라는 걸 인지하니 끔찍한 허물조차 덮게 되더군요.
“타지룬이 인간 소녀에게 모성애를 느낀다고?”
-그렇게 따지고 들면 밑도 끝도 없죠. 제가 인간 남성을 사랑하는 것부터가 비정상이니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모성애는 아닙니다. 파올로를 향한 제 감정이 그 아이에게 전이된 거겠죠.
쟈파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키누안을 찾는 이유는 복수만이 아닙니다. 그 아이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키누안을 찾아야 합니다. 키누안은 완전무결한 환상의 존재로 그 아이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저는 키누안을 현실로 끌어내 그 아이 앞에서 죽일 생각입니다. 그럼 키누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겠죠.
일리가 있다. 이대로 있다간 앙귀스 레지나는 파멸한다.
내 생각보다 쟈파는 앙귀스 레지나를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뭐, 난 이미 앙귀스 레지나의 과거와 본명을 알아냈어. 네가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이렇게 내가 캐냈으니 이제 어쩔 셈이지?”
-……당신을 여기서 죽이는 방법도 있지요. 제아무리 당신이라도 용병대 전체와 싸울 순 없겠죠. 에퀘시안 용병대가 그 일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쟈파가 날 제거하고자 한다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 했다.
에퀘시안 용병대가 포위망을 형성한다면 나라도 빠져나가기 버겁다.
‘에퀘시안 용병들은 집단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군에서도 최정예부대에서나 있을 법한 단결력이 저들에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여기까지 내가 도달한 것도 쟈파의 예상 범주에 있었다.
‘쟈파는 영악하다고 소문난 타지룬 중에서도 귀재다. 키누안의 도움을 받았다곤 하나 자신을 추방한 가문을 통째로 삼켰지.’
쟈파는 앙귀스 레지나의 정서적 불안과 키누안에 대한 집착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필연이다.’
앙귀스 레지나가 키누안과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에게 집착하는 한, 내가 여기 오는 게 당연했다.
“쟈파, 난 자력으로 여기에 도달했다. 날 더 시험할 생각이라면 관둬. 생각해보니, 넌 키누안을 쫓다가 살해당한 전임자들의 사진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었지.”
내 전임자들은 끔찍한 몰골로 죽어있었다.
-그럼 일단…….
쟈파는 주제를 회피하려 했다.
“내 말은 아직 안 끝났어. 전임자들의 죽음은 키누안의 짓이 아니지? 네가 에퀘시안들을 시켜서 죽였겠지. 내 전임자들을 죽은 이유는 앙귀스 레지나와 잠자리를 가졌기 때문일 거고.”
-재미난 추측이군요, 루카 씨. 그 아이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죽인다고요? 그런 이유라면 앙귀스 레지나와 잠자리를 가진 사람들을 제가 싹 다 죽였겠죠. 당신도 멀쩡히 살아있는 전 매니저들을 봤잖습니까.
내가 웃었다.
“그 매니저들은 앙귀스 레지나의 자위도구에 불과하니까 논할 가치가 없어. 하지만 덜 떨어진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앙귀스 레지나 안에 있는 키누안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 매력적인 여자니까 한번 맛본 놈들이 계속 쫓아다녔을 거야. 그럴수록 키누안에 대한 환상은 앙귀스 레지나 안에서 커져만 갔겠지.”
쟈파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엔에게 향했다.
-엔, 루카 씨를 내버려두고 돌아와도 됩니다. 자신의 역량을 훌륭히 증명했으니까요.
쟈파는 내 전임자들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축하한다, 인간. 오늘도 무사히 목숨을 건졌구나.
엔이 중얼거리며 물러났다.
엔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러나 쟈파는 내게 통신을 보내 말을 이어갔다.
-끝까지 앙귀스 레지나와 제 관계를 숨기고 싶었던 건 사실입니다. 당신을 무작정 시험할 생각은 아니었죠. 그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건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며, 되도록 우리에 대한 정보 노출 없이도 키누안을 찾고자 했습니다. 당신도 제게 숨기는 게 있듯이요.
“남은 이야기는 가서 듣겠다. 이젠 편안히 여길 조사하고 싶군. 파올로는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었지?”
쟈파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리운 어감이군요, 파올로, 파올로……. 파올로는 쟈파 버거의 원조 레시피를 개발한 요리사입니다. 하지만 그이의 본업은 요리사가 아니었죠.
나는 문진에 눌린 서류와 너저분히 펼쳐진 책들을 훑어봤다. 낯익은 양식의 무늬와 그림이 보였다.
-파올로 콴은 가난한 고고학자였습니다. 특히 아케인 문명에 관심이 많았죠. 파올로에겐 요식업이란 고고학 연구의 자금을 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 * *
쟈파의 홀로그램마저 사라졌다. 나는 고요한 숨을 내뱉으며 조사를 시작했다.
파올로의 서재는 아케인 문명에 대한 기록으로 빼곡했다.
‘당장은 내가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건 없어.’
중요한 건 파올로가 아케인 문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벽에 걸린 학위와 자격증을 보니 고등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다.
스륵.
파올로의 노트를 펼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필적학이라고 했던가?’
난 기억을 더듬었다.
필적학은 글자와 필체에는 사람의 성격과 감정이 드러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사실 그다지 신빙성이 있진 않다.
그러나 필적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파올로의 노트에선 한 가지 감정은 느낄 수 있었다.
‘아케인 문명에 대한 집착.’
다른 학자가 집필한 서적에도 자신만의 주석을 빽빽하게 적어놓았다.
‘그리고 질투와 열등감.’
때때로 타인의 연구를 비방하며 휘갈긴 욕설과 저주가 있었고, 자신이 했으면 더 잘했을 거라는 한탄과 분노도 메모로 남아 있었다.
‘파올로는 고고학자로는 제대로 된 인정과 지원은 받지 못했던 사내다.’
난 합리적 추론에 상황을 대입했다.
‘키누안은 아케인 문명 때문에 고고학자인 파올로와 접촉했고,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자마자 파올로를 죽였다.’
그러나 이 합리적 추론이 진실일 거란 보장은 없었다. 키누안의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뻔했다.
키누안이라면 내 예상을 뛰어넘은…… 젠장, 염병.
‘나도 크게 보면 앙귀스 레지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키누안이란 괴물을 내 안에서 한없이 부풀리고 있다. 키누안이라면 내 예측에서 벗어날 거라고 단정 짓고 있지.’
나도 이런 내 사고방식에 짜증이 났다. 내 앞에 있지도 않은 키누안에게 번번이 패배했다.
서재를 살피던 나는 수기 노트가 상당히 많이 비어있는 걸 알았다. 책장의 중간 부분만 이질적으로 텅 비어 있었다.
‘키누안이 가져간 건가? 아니면 쟈파가…….’
어느 쪽이든 중요한 사료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조사는 여기까지다. 나머진 쟈파에게 캐물으면 될 일이다.
간만에 콧잔등이 욱신거렸다. 난 한쪽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눈을 감았다.
예상 이상으로 활동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나같이 굵직한 사건들만 터졌다.
‘사옥으로 돌아가자마자 쟈파와 면담해야 한다. 쟈파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바로 몰아치는 게 나아.’
그래도 돌아가기 전에 짧게나마 휴식하고 싶었다.
난 파올로의 집을 벗어났다. 먹거리 거리를 지나서 곧장 걷다 보니 차량이 오가는 대로가 나왔다.
택시를 잡은 내가 숨을 고르며 뒷좌석에 몸을 파묻듯 기댔다.
택시 좌석 앞뒤는 금속성의 차단막으로 나뉘어 있었다. 손바닥 크기의 유리창 너머로 기사가 보였다.
“한 시간만 날 태우고 계속 운전해. 같은 경로로 빙빙 도는 건 피하고.”
택시 기사는 힐끗 날 보았다. 그가 내 초췌한 모습과 수상한 요구에 불안해했다. 그의 검지가 핸들에 달린 비상 단추에 머물렀다.
“……선불로 계산하지.”
난 안주머니에 있는 크레딧칩을 꺼내서 투입구에 넣어 정산했다. 이건 쟈파 상사와 무관한 크레딧칩이다.
“감사합니다, 손님. 정성껏! 안락하게! 모시겠습니다.”
택시 기사는 그제야 싱긋 웃더니 비상 단추에서 손을 뗐다. 저 단추를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긴 했다.
‘이제 좀 쉬겠군.’
나는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 한 시간만 쉬고 쟈파를 찾아가자. 그 정도면 회복은 9할 정돈 된다.
‘파올로에 관한 세부 정보를 쟈파에게 물어보고.’
그다음에는 발렉 조사를 이어갈 것이다. 일레이에게도 연락해 무쉬르 알 카슈라에 대해 정보를 나눠야겠지.
‘무쉬르 알 카슈라.’
전설의 용병이라 불리는 위험인물이다.
그래도 일레이라면 알아서 목숨줄 부지하며 접촉할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제국에서 12년을 굴렀으니 아키에스 빅티마 따위가 없어도 위험 감지 능력이 대단하겠지.
……생각은 그만두자. 일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양쪽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사고도 뻑뻑해서 유연하지 못했다. 머릿속의 뇌수는 젤라틴이 된 듯하다.
오늘은 여기서…….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난 중얼거렸다.
막 잠들기 직전이었다.
끼이이익!
택시가 급정거했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막 수면 직전에서 의식이 떠오르니 기분이 더러웠다.
“손, 손님. 저 앞에서 무슨 사고가 터진 듯합니다.”
택시 기사가 앞으로 고개를 길게 빼며 말했다.
도로는 꽉꽉 막혀 있었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후우웅! 쿵!
도로 앞쪽에서 차량들이 허공으로 휙휙 떠올랐다. 수 톤이 넘는 차량이 장난감처럼 도로 바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택시 옆으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그들은 도망치느라 바빴다.
무슨 난리가 난 모양이긴 하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누르면서 시간을 계산했다.
……난 사십 시간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사건을 연달아 겪었다. 감각도 둔해졌고, 인지 능력이 떨어진 게 체감될 정도였다.
지금도 재깍 상황 판단이 서지 않았다.
쿠웅!
날아온 차량 중 하나가 이쪽으로 떨어지더니 보닛을 힘껏 짓눌렀다. 엔진에 손상이 갔는지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바로 치솟았다.
“히이이익!”
택시 기사가 비상 단추를 연달아 눌러댔다.
퉁!
택시 뚜껑이 열리면서 운전석이 힘껏 치솟았다. 비상 탈출 단추였나 보다. 뭐, 보더시티에서 운전으로 먹고살려면 이 정도는…….
-5초 뒤에 본 차량은 폭발합니다. 실수로 누르셨다면 암호를 말씀해 주세요. 5……
안내 음성이 나왔다. 예전에 강도라도 당했는지 택시 기사는 멋진 자폭 장치를 서비스로 달아뒀다.
“하, 젠장…….”
‘정성껏! 안락하게!’라는 말이 택시 기사 입에서 나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상기해 보자.
-……4.
나는 발을 옆으로 뻗어서 잠긴 문짝을 걷어차며 부쉈다.
그래,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지.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곤 있지만 때때로 화가 났다.
덜컹.
난 내리자마자 택시를 발로 걷어차듯 밀었다. 도로 바깥까지 밀려난 택시가 폭죽처럼 터졌다.
콰- 앙!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다.
난 머리와 어깨로 떨어지는 불티를 툭툭 털며 코트를 가다듬었다.
가끔은 잠도 못 자고 다음 날을 시작할 수도 있지, 아무렴.
자, 오늘도 엿 같은 하루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