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내가 보더시티에 발견한 흔적들은 중첩되며 이어졌고,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앙귀스 레지나는 줄곧 내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키누안’이라면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앙귀스 레지나는 때때로 기괴한 언행까지 내뱉으며 나를 심해로 끌어들였다. 그녀와 같이 숨을 참지 못한 자는 파멸했겠지.
알려주고 싶지만, 알려줘선 안 된다.
안고 싶지만, 안아선 안 된다.
사랑하지만, 증오한다.
앙귀스 레지나의 감정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계모인 쟈파를 향한 감정도 그런 모순 중 하나였다.
‘……쟈파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난 앙귀스 레지나와 쟈파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어떻게 꿰뚫어 보신 거죠?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심정인지도 아실 수 있나요?”
앙귀스 레지나가 내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생기발랄한 손짓과 목소리는 동화 속의 요정처럼 가벼웠다.
난 목석처럼 그녀의 언행에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대단한 비밀도 아니야. 그저 다종족 가정에 흔히 있는 불화처럼 보이는군.”
“키누안이 우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랬겠죠. 파멸이 아닌 불화로 끝났을 거예요.”
앙귀스 레지나가 바에 올라섰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팔을 길게 뻗으며 가냘픈 선을 그렸다.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아, 키누안, 아아, 키누안……. 그때 제 나이는 고작 열넷에 불과했죠. 제 눈에 비친 키누안은 완벽한 남자였어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정신을 가졌으며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에서도 지성이 빛났죠.”
앙귀스 레지나가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자세를 낮춘 그녀는 고양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도 사별한 아버지가 홀로 살길 바라진 않았어요. 그러나 타지룬을 부인으로 들이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타지룬은 무정하고, 교활하고, 비열해요. 갈라진 목소리 너머에서는 우리의 신경을 녹이고 끊을 독이 들끓고 있겠죠.”
연극을 보는 듯했다. 앙귀스 레지나는 감정의 가면을 번갈아 쓰고, 때론 하나뿐인 관객의 눈길을 끄는 큰 동작으로 자세를 취하며 과거를 풀어냈다.
“그래서 아버지가 미웠던 건가?”
“그 시절의 저는 무척이나 불안정했다는 걸 알아주셔야 해요. 어느 날, 키누안이 우리에게 다가왔죠. 위기의 순간에 구세주처럼요. 아마 키누안이 없었다면 전 집을 뛰쳐나갔을 거예요. 제게 키누안은 선생이자 친구, 연인, 아버지였어요. 제 모든 감정의 방향성이 키누안에 빨려 들어갔죠.”
앙귀스 레지나의 눈동자가 환희로 빛났다.
“키누안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고, 그러고 싶었겠지.”
난 담담히 턱을 괴며 앙귀스 레지나의 공연을 구경했다.
휘릭.
앙귀스 레지나가 일어서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탁!
그녀가 멈췄다. 밝았던 표정은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시절의 모든 기억과 감정은 꿈처럼 현실감이 없어요. 내 감정과 사고를 키누안에게 의탁한 까닭이겠죠. 키누안이 어느 날 말했어요. ‘널 배신한 아빠를 쏴라.’라고 말이죠. 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총을 들었어요.”
앙귀스 레지나가 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고, 그녀의 동공은 흰자위를 잡아먹을 듯이 커졌다.
쿵, 쿵, 쿵.
그녀의 심장박동이 내 귀에 선명히 들렸다.
나는 여기선 대꾸하지 않고 말을 기다렸다.
“정말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더라도 아빠가 죽지 않을 것 같은 거예요. 총에 맞으면 사람은 죽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빠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키누안은 공들여 앙귀스 레지나를 세뇌했다. 그녀는 상처 많은 사춘기의 소녀였다. 모친을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의 불화가 있었으며 타지룬이 계모였다.
“탕!”
앙귀스 레지나가 나를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보았다. 얼굴은 홍조가 가득했으나 미간과 눈썹은 슬픔으로 휘어있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아버지를 보고서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았어요. 꿈에서 살던 소녀가 현실로 돌아온 거죠. 정신을 차려보니 키누안은 온데간데없었고요. 마치 악마가 왔다 간 것 같았어요.”
“악마가 아니야. 키누안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지.”
“키누안은 한때 제게 신이었으나 지금은 악마예요.”
“나는 악마 사냥꾼이고?”
내 농에 앙귀스 레지나가 웃었다. 그녀는 옷을 하나둘씩 벗었다. 내게 약속을 지키라는 듯이 꿀물을 흘려댔다.
드륵.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문으로 걸어갔다. 앙귀스 레지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전부 말하면 안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건가요?”
“여기서 널 기만하는 게 더 키누안 같을 테니까.”
앙귀스 레지나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울상을 짓다가 곧 웃었다. 감정의 변화가 너무나 다채롭고 극단적이었다. 저러다간 뇌가 망가질 것이다.
“마지막까지 절 홀리는 정답만 고르네요, 루카.”
앙귀스 레지나는 벗어둔 옷을 집어 들었다.
“난 꽤 모범생이거든.”
내 말에 그녀가 웃었다.
“그토록 미워했던 쟈파는 절 끝까지 감싸줬어요. 목격자들을 매수하고, 막대한 돈을 들여 전신 성형을 하게 했어요. 그렇게 과거의 저를 지워버렸죠. 그래서 쟈파는 우리의 과거를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폭로라도 하면 저는 보더시티의 아이돌에서 아버지를 쏴 죽인 패륜아가 되니까요.”
“그 편을 더 좋아하는 팬이 있을 것 같은데? 보더시티의 사람들이 그렇게 윤리적일 것 같진 않아.”
“쟈파 상사는 엄연히 양지의 기업이에요. 보더시티 바깥에도 사업체가 몇 개 있고요.”
옷을 걸친 앙귀스 레지나가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는 펜을 꺼내더니 손수건에 뭔가를 적어서 내게 내밀었다.
“이건 뭐지?”
“찾아가 보세요. 옛날에 우리가 살던 집이에요. 당신이라면 우리가 놓친 걸 발견할 수도 있겠죠.”
앙귀스 레지나가 다가오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난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뭐, 이 정도는 바람이 아닐 것이다.
* * *
나는 24시간 넘게 잠을 자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진가우, 가야의 병원과 가브리엘. 그리고 앙귀스 레지나와 쟈파가 살던 집.’
사건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하루 정도 잠을 자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서서히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인지 능력의 저하가 체감될 정도였다.
저벅, 저벅.
난 거리를 걸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밝아온다. 낮은 아니지만, 밤도 아니다.
경계의 시간이기에 보더시티는 드물게 고요했다. 야행성 종족도 잠을 자러 갔고, 주행성 종족은 잠에서 깰 무렵이었다.
‘앙귀스 레지나.’
나는 걸으며 그녀를 떠올렸다.
‘쟈파에게 물어보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그러나 쟈파는 자신에게 약점이 될 만한 불리한 정보를 내게 숨긴다. 그는 앙귀스 레지나가 과거를 실토한 사실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쟈파와 이야기하기 전에 집 안 조사를 끝낸다.’
시간대의 흐름은 대충 보였다.
쟈파는 메노아 가문에 쫓겨났다. 옛 연인의 보호를 받다가, 그 연인마저 죽고 나선 보더시티로 흘러들어 왔다.
보더시티에서 쟈파는 앙귀스 레지나의 아버지를 만났고, 얼마 있지 않아 쟈파 상사를 세웠다.
‘쟈파는 키누안의 도움으로 메노아 가문과 불가침 협상할 수 있었다. 쟈파 상사 설립 이후 한동안은 키누안과 지냈다는 거지. 아니, 애초에 쟈파 상사 설립 자체가 키누안의 조력이었을 거야.’
메노아 가문으로부터 쟈파를 보호한 건 키누안일 것이다.
‘놈이 아크바란에서 하던 짓과 흡사하군.’
난 투기장 갱단을 떠올렸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 세력을 일궈내며 신뢰를 얻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용하고 버리지.’
키누안이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의 부친에게 접근한 까닭을 찾아야 한다.
‘키누안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는 쟈파도 모를 거야. 키누안은 자신의 목적을 남에게 흘리지 않지. 그래서 더욱 찾기 힘든 거고.’
나는 가짜 발렉의 기억에 있던 키누안의 말을 떠올렸다.
‘승천.’
신이라도 되겠다는 소리인가? 이건 헛소리다. 믿어선 안 된다. 키누안은 거짓 정보를 뿌려 자신을 숨긴다.
‘놈은 이 모든 혼돈에서 무얼 얻고자 하는 거지?’
나는 라그나타의 조언도 끄집어내서 사고에 더했다.
‘키누안은 정말로 혼돈 그 자체가 목적인 괴물이 된 건가?’
그저 타인을 기만하고, 혼란을 만들어내며, 혼돈의 중심이 되는 게 그의 목적이자 즐거움이라면…….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혼돈이 목적이라면 놈에겐 약점이 없다.
‘내가 마침내 놈을 찾아 제압해 죽일 기회를 잡는다면,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죽는 게 자신의 목적이었다고 지껄이겠지.’
목적 자체가 매번 바뀌니 놈을 이길 방도가 없다.
‘거의 다 왔군.’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앙귀스 레지나가 알려준 주소로 가니 먹거리 골목이 나왔다.
지글, 지글.
기름에 익는 정체불명의 고깃덩이가 보였다. 사방이 조리의 열기로 후끈했다. 여러 종족이 자기 취향의 음식을 들고선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흠.”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공동주택 단지가 보였다. 햇빛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건물이 빼곡히 모여있었다.
이 단지는 먹거리 골목의 상인이 주로 거주하는 듯했다. 입구부터 온갖 식자재와 향신료 냄새가 뒤섞였고, 발효인지 부패인지 모를 냄새도 드문드문 내 코를 찔렀다.
끼익.
난 단지 내부로 들어가 주소지를 찾아갔다. 10층짜리 공동주택에서 5층 위치한 집이었다. 난 먼지가 쌓인 전자식 잠금장치를 바라봤다.
‘이걸 열면 쟈파에게 신호가 갈 수도 있어.’
나는 코트를 벗어선 창문의 쇠창살을 감쌌다.
끼이익.
얕은 소음과 함께 쇠창살이 휘었다.
주변을 살핀 나는 코트를 유리창에 밀착하고선 손끝으로 테두리를 여러 번 두드렸다.
쩌어억, 까앙.
피로파괴가 일면서 유리가 깨졌다. 나는 유리 조각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이건 쟈파 버거의 소스 냄새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집 안에 적응했다.
‘먼지가 쌓여 있지만, 생활감이 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군.’
가재도구가 필요한 위치에 따라 놓여 있었다. 탁한 공기와 먼지만 아니었다면 누군가 막 요리하다가 나갔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고 싶었던 건가.’
내부는 어느 날 갑자기 살던 사람이 증발한 듯한 모양새였다.
집 안을 확인하던 나는 앙귀스 레지나의 본명과 부친의 이름을 알아냈다.
‘엘리제 콴, 파올로 콴.’
나는 안방의 침대를 살폈다. 타지룬은 말랐으나 키는 인간보다 훨씬 크다. 타지룬의 평균 신장은 2미터 초반이었다.
파올로과 쟈파가 사실혼 관계였다면 침대의 길이가 타지룬 기준일 것이다.
“……정말이로군.”
난 3미터 가까이 되는 침대를 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쟈파와 인간 남성 파올로가 어떻게 성관계를 맺었을지 궁금하긴 했다.
‘뭐, 그렇다고 상상하고 싶진 않고. 그럼 쟈파의 인간식 이름은 쟈파 콴인 건가?’
난 실없는 생각을 했다.
한때 쟈파, 앙귀스 레지나, 파올로가 여기에 살았다.
부엌엔 밀봉된 유리병이 여럿 보였고, 그 안에는 소스가 그득 담겨 있었다. 아까부터 나던 희미한 냄새의 정체였다.
‘파올로는 요리사였나?’
부엌의 조리도구는 인간의 손에 적합했다. 타지룬이 요리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난 서재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삭아가는 종이 냄새가 났고, 책상에는 문진에 눌린 종이 더미가 보였다.
‘……생각보다 대응이 빠르군.’
나는 거실에서 기척을 감지했다. 나직한 한숨이 나왔다.
‘역시 언젠가 내가 여기에 도달할 거라는 걸 쟈파도 예상한 거지.’
준비하듯 칼자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등골이 서늘하다. 심지어 난 현관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공기의 흐름으로 누군가 왔다는 걸 알아챘을 뿐이다.
-무단침입은 거기까지다, 명탐정.
통역기의 기계음이 내 뒷덜미를 차갑게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에퀘시안 특유의 흉터 같은 줄무늬가 어둠 속에서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에퀘시안 용병, 엔.’
사람들은 엔을 쟈파의 사냥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