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과거에 나는 소년이었다. 뭐, 세상에 소년이 아니었던 남자가 있겠냐마는 말이다.
그 시절의 날 보던 헤일라스나 키누안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에게 나는 싹수는 보이지만 아직 보잘것없는 놈이었겠지. 짓밟으려면 얼마든지 지르밟을 수 있는 미력한 존재.
지금의 나는 소년이 아니다. 적어도 성장기는 끝났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른다워야 한다.
‘어른다운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도 싹수가 보이는 아이를 짓밟고 싶진 않았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르침을 주고 싶기도 했다.
헤일라스와 키누안도 날 대할 때마다 각자의 목적 아래에 이런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었으리라.
“보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보호자인 척하지 마.”
야나카가 총알 막기라는 기예를 보고도 적의를 억지로 끌어냈다.
그녀의 얄팍한 허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내 소년기를 떠올려 보자.
내가 소년이었다면 야나카에게 사나운 적대감을 드러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날카로운 수준을 넘어서서 보이는 족족 찌르고 다니는 미친놈이었으니까.
“보얀의 여자친구라도 되는 거냐? 취향 한번 괴팍하네.”
“그런 게 아니야. 보얀은 내 보호 아래에 있어.”
“그럼 데려가 봐라. 걱정돼서 미리 말하는데……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란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덤볐다간 바로 저승길로 갈 거다. 난 생각보다 잔인한 인간이거든.”
나는 눈을 옅게 뜨며 살의를 내면에서 뽑아냈다.
난 능숙한 살인자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다. 선을 넘어도 진즉 넘은 자다.
‘넌 선을 넘은 자인가?’
나는 야나카를 응시했다. 그녀가 움찔움찔했다.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이 된 기분일 것이다.
본능 영역에서 야나카의 육신은 나와 싸우길 거부하고 있겠지.
“루, 루카, 그만! 그만해요! 야나카는 제 친구예요.”
보얀이 애처롭게 말했다. 난 보얀을 보지도 않고 야나카만 보며 말했다.
“네 친구가 내게 총질했잖아.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적어도 팔다리 한둘은 가져가야 성에 찰 것 같거든.”
내가 손가락을 거칠게 구부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나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그녀는 자신의 후퇴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하하, 재밌네.’
야나카는 나 같은 부류를 처음 만나는 듯했다. ‘나 같은 부류’란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강자’를 뜻한다.
‘처음에는 겁먹고 주춤거리겠지. 그게 생존본능이니까. 그러나 전사의 정신을 가졌다면, 그다음은 전진이다.’
전사에게 필요한 정신 상태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두려움을 인지한 상태로 나아가는 거다.
야나카의 반응 하나하나가 재밌었다. 일류의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다.
‘팔 하나만 부러뜨려 볼까? 팔이 부러지면 비명을 지르며 전의를 상실할까? 아니면 더 격정적으로 변할까?’
이게 정신 나간 생각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궁금했다.
나는 온몸이 부서지더라도 투쟁 정신을 누그러뜨린 적이 없다. 오히려 상황이 열악할수록 역량을 바닥까지 긁어내며 싸웠다.
‘너도 나처럼 그럴 수 있을까?’
넌 팔다리가 부러져도 보얀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넌 언젠가 일류가 되겠지.
지금 나는 웃고 있을 것이다. 아주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내가 생각해도 악당이 따로 없군.
“크륵!”
난 뒤에서 달려드는 보얀의 기척을 느꼈다. 보얀이 내 등에 들러붙어서 목을 조르려 했다.
“참나, 뭐 하는 거냐. 잘하지도 못하는 싸움이나 하려고?”
내가 팔을 목덜미에 붙여서 보얀의 조르기를 막았다. 그리곤 손으로 보얀의 안면을 잡았다.
휘릭!
그 사이에 야나카가 권총과 나이프로 날 공격했다. 총성이 튀고 나이프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이 애송이들이 날 제대로 웃기고 있네.’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갸륵하기까지 했다.
콰직!
나는 보얀을 앞으로 내던져 야나카의 시선을 가렸다.
그리고 그사이에 야나카의 팔을 잡아 비틀려 했다.
스륵!
야나카는 내게 잡히기 전에 빠르게 팔을 뺐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임플란트 회로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투 반사 임플란트가 작동했군.’
일정한 환경과 조건에서 피하이식 칩이 근육에 전기신호를 보낸다. 뇌를 거치지 않는 반사인지라 그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임플란트로 프로그래밍한 전투 반사는 패턴이 단순하며 때때로 오작동이 일어나기도 하지.’
일류 영역에선 상대의 전투 반사를 파악하고 유도해 역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프로그래밍한 단순한 전투 반사? 아마추어나 쓰는 거다.
“도망가, 야나카. 루카 씨는…… 엄청 강해! 괴물이라고!”
넘어진 보얀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널 내 무리에 집어넣었어. 그러니까 순순히 어른에게 보내진 않아.”
야나카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우정이나 사랑, 그런 말랑한 감정이 아니로군.’
나는 눈을 치켜떴다. 의외였다.
‘무리의 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소속감.’
군인 출신인 내겐 저게 훨씬 와닿는 감정이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긴장 풀어. 나도 김샜으니까. 더 놀고 싶으면 놀다 와도 된다, 보얀. 어차피 네 삶이고, 난 방임주의야.”
내 말에 야나카가 오히려 반문했다.
“보얀의 약물 사용을 허가하는 건가?”
“내가 머리를 굴려봐도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나 역시 강해지고 싶어서 팔다리를 기계로 바꾸고, 신경계도 화학 처리한 인간이야. 남에게 약물 사용은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할 처지는 아니라는 거지.”
야나카도 긴장이 풀렸는지 어깨가 가라앉았다. 나이프를 쥔 손도 느슨해졌다.
“생각보다 꽉 막힌 사람은 아닌가 보네.”
“그리고 넌 부모나 어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면 혼자 해결해. 애꿎은 애들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내가 말하자마자 야나카가 사납게 날 노려봤다. 내 말이 그녀의 역린을 건드렸다.
“훈계하고 싶으면…….”
나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야나카의 전투 반사는 진즉 파악이 끝났다. 그녀의 움직임이 뻔히 보였다.
짝!
내가 한 발자국 나아가며 야나카의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발을 걷어찼다.
퍽!
입안이 터진 야나카가 비틀거리며 나이프를 들어 올리려 했다.
팅!
내가 야나카의 나이프를 손가락으로 잡아서 내던졌다.
“기특해서 한번 넘어 가주려 했더니 뭔가 착각한 모양이로군. 넌 내게 총을 쐈어. 그리고 이 자리에서 모두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는 나지. 훈계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다. 네게 듣고 말고를 선택할 자유는 없어.”
“루카 씨! 그, 그만요! 야나카는 나쁜 애가 아니에요!”
“보얀, 날 말리고 싶으면 감정에 호소하지 마라. 거래하거나 협상을 해.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냉정하게 말했다.
“저는, 저는, 루, 루카 씨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하지만, 야나카를 계, 계속 때리면 루카 씨를 미워할 겁니다. 진짜로 미워할 거예요.”
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보얀을 쳐다봤다.
“야, 인마. 지금 그게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미워하겠다고?”
“저, 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요. 가진 게 없어요. 제 유일한 무기는 보호자를 미워하는 거죠.”
난 목덜미를 매만지며 고개를 높게 들었다.
“……어이가 없지만, 일단은 그걸로 넘어가지. 다시 말하지만, 약물 과용의 기미가 보이면 바로 폐쇄병동에 처박을 줄 알아라. 아무리 나라도 네가 폐인이 되면 레고르에게 미안해지니까.”
“명심할게요.”
“쟈파에게 말해둘 테니 제대로 된 병원과 의사에게 처방을 받아. 강화 용도라면 멋대로 용량을 정해서 쓰는 게 아니다. 이건 나도 경험자니까 알아.”
조언을 마친 나는 야나카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있었다.
“내가 졌어. 보얀을 데려가.”
야나카는 우울한 얼굴로 밑을 보고 있었다. 얼핏 보니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보얀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날 따라오고 말곤 보얀이 정하는 거지.”
내가 보얀에게 턱짓했다.
“지금은…… 야나카와 같이 있다가 한두 시간 뒤에는 돌아갈게요.”
보얀이 재빨리 대답했다. 나도 그편이 좋을 듯싶었다.
나는 야나카에게 다가가는 보얀을 보았다.
그동안 나는 키누안을 쫓느라 보얀을 경시했다. 그 사이에 보얀에게 많은 일이 있었고, 야나카가 여러모로 보얀에게 도움을 준 모양이다.
난 자리를 뜨려다가 머뭇거렸다.
“그간 네게 신경 쓰지 못한 건 미안하게 됐다, 보얀.”
보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도 꽤 벌어졌다.
“갑자기 저한테 사, 사과를요? 루카 씨가?”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야?”
“전 루카 씨가 사과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줄 알았죠. 사과할 일이 생긴 상대를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사과는 안 할 거라 생각했어요.”
나도 그 정도로 뒤틀린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보얀에게 난 어떤 사람으로 각인된 걸까.
“뭐, 됐고. 문제가 생기면 날 찾아와라. 내가 바빠서 자리를 비우더라도 몇 번이고 찾아와. 적어도 상담은 하고 일을 저질러. 어지간해선 뭘 하더라도 말리진 않으마. 하지만 보호자이니까 네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보얀은 감동이라도 한 듯이 눈가를 글썽였다.
“저도 잘못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카 씨에겐 말을 해야 했어요. 앞으로도…….”
……난 이런 분위기가 질색이다.
“거기까지만 해라. 내 성격상 슬슬 한계니까.”
“아, 음, 넵. 좀 감정 과잉이었죠?”
“그래.”
보얀은 입을 다물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 *
나는 나중에서야 보얀에게서 야나카에 대한 말을 들었다.
“야나카는 우리 학교의 특기생이에요. 무슨 파일럿 관련 군사특기생이라고 하더라고요.”
“파일럿이면 비행선이라도 조종하는 건가?”
“저도 거기까진 몰라요. 아예 수업 과정이 분리되어 있으니까요. 야나카가 직접 말해주지도 않고요.”
보얀이 신난 표정으로 야나카에 대해 설명했다.
야나카는 학교 내에서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중성적 분위기가 묘하게 신비로워서 또래의 인기를 얻을 만했다.
“야나카는 길거리의 밤놀이도 한때의 일탈이라고 했어요. 어른이 되기 전까지만 즐긴다고 했죠. 그리고 다른 종족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요. 제가 뭐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더라고요.”
보더시티의 명문학교에 들어온 크롤러는 보얀이 유일했기에 야나카의 관심을 끈 듯했다.
“야나카를 좋아하는 거냐?”
“네? 제가요?”
보얀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혹시 싶어서 묻는 거다.”
“제가 특이하긴 해도…… 이종 연애는 조금 이해가 어렵더라고요. 누가 뭐래도 전 크롤러 여자가 좋아요.”
“흠, 다행이로군.”
난 팔짱을 끼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내 주변 사람 중에선 보얀이 가장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리고 쟈파 님에겐 병원을 소개받았어요. 약도 처방을 받았고요.”
이 부분을 이야기하기엔 조금 껄끄럽다.
난 솔직히 보얀이 약물 중독에 무조건 빠질 거라 생각하고 있다. 내 추측이 틀렸으면 좋겠다.
목적이 건전하든 말든 간에 상습적인 약물 사용과 의존은 필연적으로 중독에 빠진다.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롤러의 수명은 자연체 인간의 절반 정도다. 목표를 세웠으면 이것저것 따지면서 빙빙 돌아갈 여유가 없어.’
난 고개만 대충 끄덕이며 보얀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해 연방의 관료가 되면 끊을 거라 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보얀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보얀이 방에서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하고선 쟈파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
삑.
마침 쟈파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호요옷, 루카 씨. 혹시 지금 곁에 보얀이 있나요?
“방금 떨어진 걸 확인하고 연락한 거잖아. 시치미 뗄 필요는 없어.”
-흠흠, 까칠하시긴. 예의상 해본 말입니다. 보얀에 대해선 이야기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야나카라는 소녀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그 여자애가 왜?”
-그 소녀와는 문제가 생기면 안 됩니다. 그쪽은 저도 감당할 수 없어요. 뒷조사를 해보니 연방정부의 군사 프로젝트와 관련된 아이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음, 팔다리를 분지르지 않길 잘했군.”
-저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나도 농담 아니야. 진짜로 그럴 뻔했어. 그 애가 먼저 총까지 쐈다고.”
잠시 침묵이 일었다.
-루카 씨는 총알 좀 맞는다고 안 죽잖습니까.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른답게 참으세요.
어른이 되는 건 더럽게 어려운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