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쟈파는 내가 부탁한 지 열흘 만에 명단을 보냈다.
삑.
난 단말기의 홀로그램으로 명단을 확인했다. 쟈파는 보더시티에 상주하는 의체 관련 종사자를 싹 다 조사해서 내게 보냈다.
의체 정비사와 공학자, 그리고 사이버네틱 관련 전문가까지 분야별로 정리한 명단이었다. 그중에서 전신의체 시술 경험이 있거나 가능한 기술과 시설을 갖춘 사람도 별도로 추려서 정리해 뒀다.
‘쟈파가 보더시티를 주름잡고 있긴 하군.’
난 명단을 눈으로 훑었다. 대강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이 잡혔다. 주소가 첨부된 지도가 있어서 부지런히 며칠을 움직이면 탐문이 끝날 것 같았다.
나는 명단을 살피다가 메시지가 홀로그램 화면에 떠오른 걸 확인했다. 라피스의 연락이었다.
-루카, 주문한 물건이 완성됐어요. 사용법도 설명해야 하니 한번 들리세요.
난 그 물건이 뭔지 잠시 생각했다.
‘화광예도의 예열 도구로군.’
라피스는 내 부탁을 잊지 않았다. 부탁한 나조차도 기억 저편에 던져두고 있던 사안이었다.
끼릭, 딸깍.
나는 장비를 챙기고선 방을 나섰다. 곧장 라피스의 정비실로 향했다.
“아, 바로 왔네요?”
라피스가 날 반기며 말했다. 그녀는 고글을 뿔에 걸치고선 쉬고 있었다.
“일 처리는 빠를수록 좋지. 물건은?”
난 자리에 앉지 않고 재촉했다.
“거기 올려둔 손바닥 크기의 금속 상자요. 사용법이 따로 있으니까 설명해 줄게요.”
라피스의 시선을 따라가니 금속 상자가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손바닥만 해서 코트 주머니에 넣거나 허리춤에 매달 만한 크기였다.
‘밋밋하게 생겼네.’
외부 장식조차 없는 금속 상자였다. 상자에는 칼날이 들어갈 만한 틈이 두 개 있었다.
“뭐, 딱 보니까 알겠네. 설명까지 해줄 건 없어. 그냥 실전에서 써보면 알…….”
내가 금속 상자에 손을 올리려 했다.
깡!
라피스가 내 손등을 묵직한 정비 도구로 때렸다. 찡한 감각이 내 정수리까지 치밀었다.
“헛소리 말고 설명이나 들어요. 개인 공방에서 만든 물건은 규격화된 공산품과 달라요. 맞춤형이기 때문에 사용법을 직관적으로 아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대충 방아쇠 당기면 총알이 나가는 그런 물건인 줄 알아요?”
“……알았어.”
내가 성급하긴 했다.
장인은 타협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걸 무시해선 안 된다. 사람마다 역린이 있는 법이지.
“생긴 건 단순하게 생겼어도 엄청 공들여 만들었다고요. 이왕 만드는 거 확실하게 하자고 생각했죠.”
“흠.”
생긴 것만 봐선 공들인 도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 떨떠름한 반응에 라피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숫돌 역할을 할 이그니움을 구매했어요. 진짜 경매장에 100그램 정도 나온 걸 겨우 구했어요. 공정도 제가 할 능력은 없어서, 자존심 구겨가며 가공 시설이 있는 다른 타르파 공방에…….”
라피스는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난 지루했지만, 일단 들어주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머리를 종종 끄덕였다.
“사실은 은하도공의 철학을 위배하는 물건인지라 만들기가 꺼림칙했어요. 그 예술적인 순환설계 방식을 무시하는 행위거든요. 그 설계를 위해 얼마나 머리를 싸맸을지 예상이 가니까요.”
“하지만 결국 실패한 놈들이잖아?”
내가 조롱하듯 어깨를 으쓱하자, 라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를 냈다. 흠, 라피스를 놀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하, 진짜. 그 도전 의식이 중요한 거라니까요. 존중을 표하세요, 존중!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요.”
“알았어. 사용법은? 이 틈에 칼날을 집어넣었다가 빼는 게 맞지?”
내가 경솔한 행동을 할 때마다 라피스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이거, 조금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재밌군.
“아직 손대지 말라니까요. 일단 이름은 ‘파이’라고 지었어요. 철자는 ‘F.A.I’이고 연방 공식 표준어로 불꽃과 얼음의 줄임말요.”
“불꽃과 얼음? 예열이 아니라 냉각 장치도 달아둔 건가?”
“그래서 괜히 찜찜하다는 거예요. 은하도공은 그런 외부 장치 없는 순환설계를 통해 독립적인 무기를 만들려고 했거든요. 마치 전설의 칼처럼 말이죠. 땅속에 수백 년 동안 묻혀있어도 막상 꺼내면 작동하는 물건이죠. 만약 과학기술이 실전한 시대에 화광 시리즈가 발견된다면 신검이나 마검이라고 불릴걸요.”
그래 봤자 실패했잖아. 난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삼켰다. 라피스는 은하도공의 장인들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더 놀리면 라피스는 진심으로 화를 낼 것이다.
“틈이 두 개니까, 하나는 냉각용, 다른 하나는 예열용? 파란색 테두리 틈이 냉각이지?”
“네, 그리고 냉각공은 카트리지 시스템이라서 흡열이 끝나면 냉매를 배출해야 해요. 그리고 흡열이 끝난 냉매는 초고온이니까 절대 그냥 만지면 안 돼요. 의수도 손상을 입을 테니까요.”
나는 파이를 응시했다. 괜히 외부가 밋밋하게 생긴 게 아니었다. 열 전도성이 낮은 특수강으로 만든 물건일 것이다.
“특수강으로 만들어서 가공이 힘들었던 모양이네.”
내 의체는 미적인 감각이 나름 돋보이는 물건이고, 이걸 만든 사람은 라피스다. 라피스가 만든 물건치고는 파이의 생김새는 투박했다.
“맞아요. 안 된다는 걸 두 배까지 웃돈을 얹어주고 가공 요청을 했다니까요. 어차피 쟈파 님의 돈이지만요. 다른 곳에선 이런 작업을 해볼 일이 없었겠죠. 좋은 경험이 됐어요.”
나는 파이의 칼날 틈을 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냉각공은 예열공보다 조금 넓긴 했지만, 그래도 칼날이 정확히 집어넣어야 들어갈 터다.
“플라즈마 상태의 칼날에 닿으면 특수강이라도 녹지 않아?”
“그렇죠. 예열할 땐 삽입구에 부딪혀도 괜찮지만, 냉각공에는 정확히 넣어야 해요. 그래서 문제가 있나요? 루카의 의체 숙련도를 보니 동작 정확도가 안드로이드 수준으로 높던데요.”
라피스의 신뢰를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뭐, 문제는 없지. 내가 실수만 하지 않으면 괜찮아. 실수하지 않겠지, 흠.”
……파이를 통해 냉각하다가 실수하면 내 손가락이 우르르 날아가거나 손목이 잘려나갈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런 각오도 없이 들고 다닐 칼도 아니긴 하지.’
냉각 기능은 기대도 하지 않은 덤이다. 투덜거릴 필요는 없다.
“옆에 있는 추가 냉매 카트리지도 가져가고요. 카트리지는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말하세요. 제작에 시간이 걸리니까요.”
나는 주섬주섬 파이와 카트리지를 챙기다가 라피스를 힐끗 보았다.
문득, 길다가 떠올랐다. 길다와 라피스는 종족이 달라도 관심사와 성격이 비슷했다. 둘 다 부드럽게 다정다감하면서도 강인하다.
“라피스, 굉장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뭔지 몰라도 말해봐요.”
“절친했던 친구를 미워하게 된 경우가 있어?”
라피스가 흰자위가 없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당연히 있죠. 제가 루카보다 더 오래 살았을 테니까요. 혹시 인간관계 고민 중? 이 누님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보려고요?”
나보다 한참 작은 라피스가 누님이라고 칭하니 기분이 묘했다.
“……너와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그간의 심적 변화를 추측해 보려고.”
라피스는 자리에 앉더니 턱을 괴고 눈을 감으며 생각에 빠졌다.
“저 같은 타르파 종족이 대개 그렇듯이, 저도 외골수 성향이 있고 남을 쉽게 미워하지 못해요. 냉정하게 말해서, 타르파 종족은 순한 성향 때문에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죠. 그 때문에 타종족과 교류를 처음 시작한 어린 타르파들은 큰 상처를 입어서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기도 해요.”
“너는 그렇지 않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라피스가 미소를 지었다.
“전 경험이 많으니까요. 쟈파 님도, 루카도…… 어쨌든 전 당신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저를 배신하지 않을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걸 발견한다면 저를 속이고 이용하려 들겠죠.”
라피스가 다르게 보였다. 그저 순수하고 착하기만 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라피스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우리 타르파는 배신을 많이 당해요. 우리가 배신을 당하는 이유는 눈치가 없거나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상대가 배신할 거라는 걸 알아채고도 끝까지 부정하며 믿으려고 하다가 당하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 절대적 신뢰가 끔찍한 증오로 바뀌죠. 믿음의 대가가 배신으로 돌아오는 순간에요.”
타르파 종족의 눈동자는 흰자위가 없이 검다. 평소에는 순하게 맑아 보이던 라피스의 눈동자가 한없이 탁하게 보였다. 그녀의 어둠이 처음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루카, 아까 물으셨죠? 언제 친구를 미워하는지요. 그 대답을 방금 했어요. 우린 고집스레 믿은 만큼, 배신한 사람을 고집스레 미워하죠. 다른 종족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집착합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을 수 있나?’라는 생각이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나?’로 바뀌어요.”
나도 방금 느꼈다.
‘라피스 라줄리를 적으로 두면 안 된다.’
푸른 피부를 가진 어린 외모의 외계종족. 소와 같은 뿔이 머리에 한 쌍 솟아나 있다. 겉보기엔 만만해 보이는 종족이다. 그러나 타르파 종족은 연역한 체격으로 타지룬, 크롤러, 인간, 에퀘시안…… 그런 사나운 종족과 뒤섞여 살아가는 주류 종족 중 하나다. 증오의 저력도 깊다는 뜻이다.
난 상상력을 발휘해 봤다. 라피스의 호의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순간을 말이다. 그 감정의 크기와 깊이는 대단하겠지. 날 죽이기 위해 온갖 무기와 장비를 만들어낼 터다.
“……제법 오싹하네.”
내가 말했다. 라피스는 언제 탁한 눈을 했냐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깊게 생각할 건 없어요. 어지간해선 그런 일은 없죠. 저도 다른 타르파처럼 인내심이 무척 많거든요. 별것 아닌 일로 남을 미워하지 못해요. 제 감정이 증오로 바뀌려면 정말로 끔찍한 짓을 저질러야겠죠. 누가 봐도 죽어 마땅한 그런 일요.”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피스도 문으로 걸어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야기는 고마웠어, 라피스.”
정비실을 나선 나는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를 돈 나는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가 서서히 식어갔다. 그간의 증언과 이야기를 토대로 길다와 지젤 사이의 갈등이 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지젤은 어떤 방식으로든 길다를 배신했다. 길다도 처음에는 수없이 참았겠지.’
지젤이 길다를 배신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지만…… 아니,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면서 지젤을 옹호할 건 없다.
‘나도 알아. 지젤은 불안정한 데다가 성격이 좋진 않지. 하지만 단순한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할 사람은 아니야.’
지젤에 대한 주변인의 증언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좋게 말한 사람이 없었다. 지젤의 경호 책임자였던 가브리엘조차 중립적으로 말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지젤은 관계의 뒤틀림과 오명을 감수하며 움직였다.’
하나의 결론이 내 안에서 나왔다.
나는 앞니로 새어 나올 것 같은 탄식을 삼켰다. 나약하게 굴긴 싫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미 단서는 잡혔다. 눈앞의 일을 빨리 해결하고 움직일수록 지젤과 가까워진다.
‘복잡한 계산은 집어치워.’
난 초점을 새로이 다졌다. 지젤의 흔적을 발견하면 된다. 그녀만 찾는다면 나머진 내 알 바가 아니다.
키누안 추적, 쟈파와의 협력, 제국과 일레이.
모든 건 지젤을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지젤만 찾는다면 전부 내다 버릴 수 있다.
항상 뒤늦게 깨닫긴 하지만, 라그나타의 말은 대체로 옳았다. 그래서 화가 더 나는 거지.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순정남이 맞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