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Bad Born Blood Chapter 206

206
선악이 분명한 세상은 멋질 것이다.

악으로 규정된 존재에겐 그 어떤 비난과 모욕, 폭력이 허용되는 아름다운 세상. 생각만 해도 편리하기 그지없다.

그런 이분법적 세상에선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약과도 같은 싸구려 정의감에 취한 채로 악당을 찾아 삿대질하고 돌을 던지면 그만이다.

……그래, 이건 유아적인 망상이지.

현실의 선악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대다수 상황에서 선악 구분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나는 옳고, 타인은 그르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사고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옳음의 기준은 오로지 나.’

그리고 확장하면 내 가족과 지인, 주변 사람들까지 ‘옳은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기준은 얄팍하고도 얄팍하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금세 선악을 나누어 ‘나와 조금만 더 다른 사람’을 악으로 규정한다. 그렇게 가벼이 ‘악’을 끝없이 규정하다 보면 어느덧 세상 모두가 악당이 된다.

……타인을 서슴없이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독선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이다. 진정으로 역겨운 최악을 토해내는 건 독선자들이다.

‘지젤과 일레이.’

내겐 소중한 사람들이다. 난 그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젤과 일레이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젤은 일레이를 믿지 않았어. 곰곰이 생각하면 이해가 되긴 하지. 일레이가 마냥 믿음직스럽게 활동하는 놈은 아니니까.’

두 사람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잘못한 존재이며 악이란 말인가?

둘 중 하나를 악으로 규정한다면 내 속은 편하겠지. 여기서 일레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마음껏 비난한다면 내 심리적 안정감은 높아질 것이다. 이 모든 뒤틀림을 일레이의 탓으로 몰아세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건 현실과 거리가 먼 사고방식이다. 일레이와 지젤은 동화 속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복잡하게 얽힌 인과에서 그저 자신의 판단이 옳길 바라며 수없이 기도하는 현실의 존재다.

“……난 지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어. 가끔 협박에 가깝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지. 정말로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일레이가 그간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는 지젤에게 날 넘기고 나서 내 행방을 알지 못했다.

“지젤은 널 황제 측의 사람이라고 판단했겠지.”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내가 이반의 편이라면, 진즉 넌 이반의 손에 넘어갔을 거야.”

“적어도 지젤이 보기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는 거다. 지젤은 우리와 달라. 너나 나, 이반과도 같은 자들은 지젤의 입장에서 괴물이나 마찬가지라고. 네가 정말로 이쪽 편인지 확신이 힘들었을 거야.”

내 말에 일레이가 내려놓았던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루카, 넌 아직 어리구나. 너 공백기가 많지? 도대체 몇 년인 거지? 재기불능에서 회복해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거야. 하기야 네게 수년의 시간이 있었다면 정황을 줄줄 꿰고 있었을 거고.”

일레이가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공백기가 있다는 건 내 치명적인 약점이다.’

상대가 일레이일지라도 내 약점을 먼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들켰다.

“빈정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해.”

“지젤이 우릴 괴물로 본다고? 우리가 괴물이라면, 지젤도 우리와 같은 선상에 선 괴물이야. 나 원, 감정이 앞서는 건 알겠지만 판단력을 잃진 마. 다시 말하지만, 지젤은 나는 물론이고 이반의 눈까지 속이면서 널 빼돌렸어. 이게 무슨 소리인지 풀어서 설명할까?”

“아니, 됐어. 이해했다.”

내가 짧게 대꾸했다. 추잡하게 굴 건 없다.

지젤이 변했다는 걸 인정하자. 내가 저승의 강변을 서성이는 동안, 그녀는 험난한 일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일단 내 말은 여기까지다. 루카, 너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일레이는 정보 제공을 멈췄다. 지젤의 이야기에서 끝내니 교활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교활하다는 거지 불공평한 건 아니다.

“뭐, 그래야 공정하겠지. 나는…….”

나는 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훑다가 입을 열었다.

쟈파의 후원을 받아 라자루스에서 깨어난 일을 일레이에게 말했다. 세세한 부분까지 말한 건 아니지만, 대략적인 흐름에 대한 설명은 끝냈다.

일레이는 찬찬히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니까 널 찾을 수 없었던 거로군. 라자루스는 의료기관으로 그다지 훌륭한 조직이 아니지. 연구기관에 가깝다고 보면 돼. 지젤이 거기에 널 집어넣을 줄은 몰랐어. 널 치료하려고 했다면 라자루스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많거든.”

“그렇기에 라자루스에 날 집어넣은 거겠지. 더 나은 선택지가 있지만, 널 속이기 위해 지젤은 나쁜 선택지를 고른 거야.”

“……그런 의미로도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라자루스에 대한 이야기는 보류하지. 지젤이 라자루스에 널 집어넣은 건 엄연히 사실이니까.”

일레이는 지젤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날 위한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할 때, 지젤과 일레이 사이의 견해 차이가 컸을 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레이는 라자루스에 날 집어넣은 지젤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 많은 의문이 솟구쳤다. 그러나 지젤을 직접 만나기 전엔 해결하기 힘든 의문들이다.

‘지금의 지젤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그저 타인의 관점과 시야로 논한 지젤만 알 뿐이다.

“정리하자면, 쟈파 상사의 지원을 받아 키누안을 추적하고 있는 거로군. 발렉의 기억 추출은? 설마 못 한 건 아니겠지? 천하의 루카가?”

“도발은 작작 해. 그것도 못 했다면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이밀었겠어. 그리고 너도 머저리 같은 실수를 했다. 네가 죽인 놈은 발렉이 아니야. 발렉의 의체를 빌린 부랑자였어. 키누안이 기억을 추출할 것까지 예상하고 전언을 남겼더군.”

일레이도 이건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발렉은 내가 보낸 부하 두 명을 죽이고 도주한 적이 있어. 예사 실력이 아니라서 급습해 제거한 거지. 어쩐지 너무 쉽다 했더니…….”

“실력을 보여준 것도 의도했을 거야. 말도 걸지 않고 급습할 거라는 것도 놈의 계산에 있었던 거지. 발렉은 의도적으로 주변에 정보를 흘렸어.”

“아키에스 빅티마는 여러모로 짜증이 나는군.”

일레이가 눈을 찌푸리며 술을 마셨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까다롭다. 내가 키누안 추적에 적격인 이유였다. 외부인이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의 사고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사고의 속도를 따라잡아도 시야와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에 대해 알아?”

일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국에선 유명 인물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국에서 유명했다면 나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해졌어. 제국의 정교한 감시체계는 폐쇄적이다. 바깥세상까지 자세히 보진 못해.’

제국, 정확히 말해서 황실은 제국 내부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통치에 이용한다. 황실의 감시 역량은 언제나 내부로 향하고 있다.

제국은 극단적인 감시체계의 존속을 위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와 교류가 잦을수록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아진다. 황실이 역량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제국 바깥 세력의 동태까지 전부 파악할 순 없으니까.’

제국은 인류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국가들조차 적성국으로 봤다. 외계종족은 말할 것도 없이 사납게 배척했고, 제국 바깥의 일은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다.

‘이반이 나를 찾지 못한 이유. 지젤이 보더시티에서 체류 기간을 길게 가진 까닭. 일레이가 나와 만나서 떠들 수 있는 상황.’

이 모든 게 황실의 역량이 바깥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키누안은 무쉬르 알 카슈라를 만나면 자신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라 말했어. 이건 네가 맡아라, 일레이. 난 따로 진짜 발렉을 쫓겠다.”

“너답지 않네. 주 임무인 키누안 추적을 내게 맡기는 건가?”

나는 웃었다.

“키누안은 나와 무쉬르 알 카슈라가 만나길 원할 거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 이건 나를 위한 안배일 거야. 그러니 네가 가야 한다. 놈의 예상대로 우리가 움직일 필요는 없어. 이런 내 판단 또한 놈의 예측 범주에 있겠지만, 적어도 놈의 계획상으로는 최적의 행동이 아닐 거야.”

난 키누안의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어야 한다. 판단과 선택 한 번으로 놈의 계획을 망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키누안의 예측에서 조금씩이나마 벗어나다 보면 아무리 크게 펼쳐둔 계획이라도 일그러질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일레이의 눈이 커졌다. 그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일리가 있네. 나라면 이런 생각을 못 했을 거야. 너와 협력하는 건 임무 수행 측면에서도 합리적이로군.”

나는 술을 섞은 우유를 마셨다. 마시다 보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일레이, 폭풍기에 키누안은 무슨 짓을 한 거지?”

질문을 던진 나도 별다른 기대를 한 건 아니다.

“그 내막을 아는 건 이반 말곤 없어. 한 가지 확실한 건…… 키누안을 확보하면 이반과 대등한 위치에서 거래할 수 있다는 거지. 나 말고도 키누안을 쫓는 부대가 더 있어. 놈들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 나처럼 넘어가 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켰다.

‘일레이 카르티카, 그럼 네 진짜 목적은?’

물어봤자 말해주지 않을 터다. 그저 두리뭉실한 말과 미소로 질문을 넘기겠지.

우리는 부가적인 정보교환을 더 했다. 키누안을 찾을 때까진 우린 협력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제국 내부에서 활동하는 일레이와 정보를 교환한다면 내 시야와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일레이도 내 도움을 받는다면 키누안을 추적하는 일이 더 수월해진다.

“일레이, 길다와 접촉해 봤어?”

“몇 번 만났지만 마땅한 성과는 없어. 길다는 이쪽 세계의 일을 잘 몰라. 그래도 지젤과 갈등이 있긴 했나 보더군.”

“길다가 지젤의 행방불명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내가 아는 길다라면 지젤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친절하고 다정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건 12년 전의 길다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내가 보기엔 모르는 눈치였어. 하지만 네가 보기엔 다를 수 있지. 내 관찰 능력은 너보다 떨어지니까.”

“그럼 다르게 물어볼게. 지젤이 행방불명되고 나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길다가 맞아?”

일레이는 동작을 멈췄다. 그는 머릿속에서 정보를 취합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럴 거야. 분열 직전이었던 회사를 정돈하고, 무리한 사업 확장도 멈추면서 내실을 다질 수 있었지. 밑바닥에서 시작한 기업치고는 입지가 단단해.”

나는 서늘하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철저하게 이해관계를 따져보자.

가브리엘의 증언을 돌이켜보면, 길다는 지젤을 내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키누안의 의도가 개입됐더라도 실행범은 길다일 가능성이 있었다.

인간성 측면을 배제하고 보자면, 유력한 용의자가 훤히 보인다. 지젤이 사라져서 이득을 볼 사람은 길다뿐이다.

“일레이, 길다를 주시하다가 제국 바깥으로 나오면 말해줘. 그때 내가 찾아갈 테니까.”

“길다와 직접 만나겠다고? 그 여자를 신뢰할 수 있겠어? 길다는 네 존재를 제국에 보고할 수도 있어.”

“만나보고 결정할 일이지. 만약, 믿을 수 없다면…… 베면 그만이야.”

일레이는 나를 응시했다. 그는 흐릿한 연기 사이로 쓴웃음을 지었다.

“루카, 정말 그래야 할 거다. 내가 널 보고도 그냥 넘어갔다는 걸…… 이반이 알게 된다면 나도 끝장이야. 판단이 서면, 날 위해서라도 길다를 죽여야 해. 이번엔 물렁하게 굴지 마. 어쨌든 길다 쪽은 내가 따로 지켜보지. 회사가 커졌으니 제국 외곽이나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있을 거야.”

일레이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일이 있나 보군.”

“적당한 핑계가 있어야 보더시티에 체류할 수 있으니까. 간단한 임무를 맡아서 시간을 짜낸 거야. 뭐, 즐거웠다, 루카. 술값은 내가 내지. 다음엔 네가 사. 나도 은근히 박봉이거든.”

일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가 나가는 걸 보았다.

서로 할 일은 결정됐다. 난 흔적을 감춘 발렉을 쫓는다. 일레이는 무쉬르 알 카슈라를 찾는다.

스스스.

난 등골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사고가 한없이 깊어지다 보면, 불안한 생각이 종종 나를 덮치곤 한다.

‘아마, 분명히, 일레이와 나 사이엔 갈등이 생길 거다…….’

나도 안다. 이건 위태로운 협력이다. 일레이에겐 중요한 목적이 따로 있다.

어쩌면 일레이는…… 우정이 아니라 개인적 목적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며 나와 협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키누안을 찾으려면 내가 유용할 테니까. 사고가 자꾸만 부정적으로만 간다.

……또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못된 생각만 하고 있구나, 루카.

Join our Discord for the latest updates and novel requests - Click here!

Comment

0 0 votes
Article Rating
Subscribe
Notify of
guest
0 Comments
Oldest
Newest Most Voted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